시대별 도량형제도의 발전
1) 우리나라 도량형의 기원
상고부터 우리나라에서 도량형제도를 통용하고 있었음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등의 기록을 보아서 알 수 있다. 이들 기록중에서 치[寸], 척[尺], 장[丈], 필[匹], 이[里], 근[斤], 석[石]등과 같은 단위는 삼국이 똑같이 사용하였는데, 그러한 단위명들은 중국에서 사용되었던 단위명임이 확실하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나라에서 통용되고 있었던 옛 도량형제도와 중국의 옛 도량형제도 사이에 밀접한 관련성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기록에 의하면 고려 태조는 통일신라의 도량형제도와 조세제도를, 조선태조는 고려의 도량형제도와 조세제도를 각각 그대로 계승하였다고 한다. 세종조에 이르러 문란했던 도량형제도를 정돈, 통일하였을 때 부피의 표준량과 무게의 표준량은 옛 것을 그대로 표준화시켰다. 따라서 통일된 세종조의 부피와 무게의 표준량은 통일신라의 그것과 같은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우리나라 양형제도는 세종 때 통일된 영조척을 통하여 상고의 제도까지도 규명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2) 삼국 및 통일신라의 도량형
가. 척도 - 척도에 관한 유물이나 정확한 기록이 전혀 없는 관계로 옛날에 사용된 척도의 종류나 그 길이는 당시의 척도를 기준하여 만들어진 유물이나 유적을 정밀하게 측정하여 밝혀내야 한다. 통일신라 때의 석굴암, 석가탑, 첨성대 등은 당대척을 기준하여 만들어졌는데 석굴암에서는 길이 29. 706㎝의 당대척이 얻어졌으나, 석가탑과 첨성대는 건설 당시의 원형이 아니어서 그것들은 30㎝ 전후의 당대척으로 건설된 것임이 밝혀졌다. 구례 화엄사의 신라 석등은 20.45㎝의 주척이, 속리산 법주사의 쌍사자석등에서는 길이 20.54㎝의 주척이 얻어졌는데 주척의 원시척인 양전용(量田用)의 10지, 길이에서는 19.42㎝의 지척 길이가 얻어졌다. 또 한강변 방이동 백제고분(百濟古墳) 석실에서는 길이 23.25㎝의 순제척의 신장척이 얻어졌다.
나. 양형제도 - 통일신라의 양형제도는 문무왕을 전후하여 큰 변화가 있었는데, 그것은 681년(문무왕 21)에 표준량의 개정이었음을 밝혀준다. 이때 개정된 도량형제도는 고려로 전해져 고려와 조선 세종 때의 양형제도의 표준량을 보면 681년에 개정된 내용을 알아낼 수 있다. 밝혀진 양제의 표준량은 옛 표준량의 3배로 바뀌었다. 이러한 개정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당나라와 교역상 양형제도의 기준량을 당나라 제도와 비슷하게 맞추기 위한 데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이때의 부피와 무게의 표준량이 도입된 것이 아니었음도 입증해준다. 681년 개정되기 전의 1승은 198.81㎤이고, 개정 후의 1승은 그것의 3배 가량인 596.42㎤이다.
3) 고려의 양제개혁
통일신라의 도량형제도와 조세제도는 고려까지 계승되었는데, 고려의 문종은 992년(성종11)에 옛 제도였던 단일조세법(單一租稅法)을 차등조세법(差等租稅法)으로, 이를 다시 동과수조법(同科收租法)으로 고치기 위하여 먼저 양제개정을 실시하였다. 이 때 개정된 내용에 의하면 단일양기제도로 개량되어 온 모든 곡물들을 1승의 값이 똑같을 수 있게 네 종류의 복수양기제도(複數量器制度)로 만들었다. 이때 부피의 표준은 예로부터 기전척으로 1입방척(立方尺)이 되게 만들어져 전해왔던 표준량원기(標準量原器)의 양을 미곡을 정항고 이 양을 기준하여 다른 양기들의 양제도를 정하였다. 그러나 당시 밭에서 생산되었던 주곡인 콩과 팥을 계량하기 위한 양기의 표준량만은 반값에 해당하는 부피를 표준으로 정했음을 볼 수 있다. 이때부터 네 종류의 표준양기가 가져야 할 부피의 비율을 정밀하게 하기 위하여 양기용 기준척도를 기전척에서 당대척으로 고쳐 표시하였다. 이때 표준량기의 명칭도 미곡, 대소두곡, 말장곡, 패조곡, 등 중국의 신량제명인 곡(斛) 단위가 처음으로 도입되었지만, 그 곡의 용적량이 7두 5승으로 중국 양제단위명과는 다르게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송나라에서 2곡을 1석이 되게 석단위가 무게 단위에서 부피단위로 제정된 사실과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송나라의 1곡은 5두였다.
4) 세종 때의 도량형 개정
가. 척도통일 - 고려 이래의 도량형제도는 오랜 세월이 경과하는 사이에 각종 척도가 길이를 달리하여 정확한 제도를 만들어 실시하기가 곤란하였다. 그리하여 1430년(세종12)에 정확한 표준척을 제정하여 전국적으로 시행하였다. 이때 고정된 표준척도에는 주척, 황종척, 영조척, 조례기척, 종서척, 횡서척등이 있었는데, 다음해인 1431년에는 포백척이 고정, 실시되었다. 이 중의 황종척은 박연이 표준이 없이 문란했던 아악(雅樂)을 바로잡기 위하여 해주산 검은기장 알을 기준으로 당악의 기본음률과 일치하는 음률관(音律管)을 만들기 위하여 제작한 표준척이다. 세종때 고정된 표준척 사이의 길이 관계는 《경국대전》호전 도량형조 기록에서는 가장 표준이 되는 주척의 길이가 잘못 기록되어 척도 사이의 길이의 관계 수치가 맞지 않게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잘못을 안 순조는 1820년에 이 단위까지 나타낸 정확한 길이로 정정하고, 이 사실을 육전조례에 이정주척항(釐正周尺項)을 두어 밝히고 있다. 세종 때 만들어진 표준척이 이미 없어졌으므로 육전조례의 이정주척기를 기준하여 현존하는 순조 때의 수표척, 남대문루, 원각사 십층석탑 등을 실측하여 세종 때 표준척이 재현되었다. 이 재현된 세종 표준척의 정확성을 밝히기 위하여 황종척을 기준으로 하여 황종율관을 정밀하게 만들어 불었을 때 나는 소리의 높이를 측정하였는데, 그 진동수가 269회로 세종음악의 기본음과 정확히 일치함을 확인하게 되었다. 또 고선음률관의 길이 24.676㎝가 당소척(唐小尺)의 길이 24.697㎝와는 0.14㎜차이로 거의 일치하여, 그 두 음률관이 내는 소리는 청각으로서는 구별할 수 없음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재현된 세종표준척도가 세종 당시의 척도와 일치하고 있었음을 입증해준다. 아울러 순조 때 만들어진 수표에 조각된 갑술양전주척은 세종 때 표준척을 재현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척도표준임을 밝혀준다. 이 수표주척의 보존에서 고려는 물론 삼국 및 선사시대의 제도들을 명백히 입증할 수 있게 되었다. 세종 표준척이 밝혀지면 또 한가지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제도는 1444년에 개정된 6등전제도의 각 등전 면적·조세량·수확고를 밝힐 수 있게 된다. 이때 제정된 일등전척의 길이는 주척으로 4,775척이라 하였으므로 99.30㎝가 되어 1m와 근사하였다.
나. 양제개혁 - 조선 세종 때까지 통용되던 양제도는 고려 문종이 제정한 복수양제였다. 문종 때 제정된 양기들은 모두 같이 29.582㎝의 당대척을 기준한 것이었다. 이러한 길이의 척도는 중국에서도 이미 없어졌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신장척이 영조척이라는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조선의 건국 후 명나라의 문화가 수입되자 명나라의 영조척이 도입되어 널리 통용되고 있었다. 이러한 관계로 1430년에 통일된 새로운 표준척을 고정할 때도 영조척을 취했던 것이다. 세종 때 통일한 도량형제도를 보존시키기 위해서 양기척도 표준화된 영조척을 기준하여 그것에 맞추어서 1549년에 양제개혁과 함께 전국에 나누어 보관하게 하였다. 이 개정은 고려 문종 때 제정된 미곡의 표준량과 양제도를 그대로 이어받고, 나머지 3종의 양기제도를 단일양제로 고쳤다. 따라서 세종 28년의 양제개정은 바로 통일신라 및 고려 초기 양제도로 환원된 것이다. 다만 세종 28년의 양제개정이 통일신라 때와 다른 점은, 첫째 양기들이 입방체로 되어 있던 것을 직방체(直方體)로 고쳤던 점이며, 둘째 7두 5승을 1곡, 15두를 1석으로 하였던 제도를 15두를 평석(平石) 1석 또는 대곡(大斛) 1곡으로 하였던 점이다. 기록에서도 양제개정이라 하지 않고 양제의 체제개혁이라 하였다.
다. 무게표준의 통일 - 세종 초기에 옛 저울을 기준하여 경시서(京市署)에서 새로운 저울을 만들어 보급시켜 문란하였던 저울들을 통일시켰다. 또 ≪경국대전≫에는 황종율관에 우물물을 채워 그 물을 무게를 표준으로 하여 정하고 그것을 88분(分)으로 정한다고 하였다. 중국 도량형제도에 관한 ≪한서율력지≫에 의하면 황종율관에는 1200알의 검은 기장알이 들어가는데, 그 무게를 무게의 표준으로 정하여 12수(銖), 24수를 1냥으로 하였다. 세종 때에도 정확한 황종척이 얻어졌으므로 황종율관의 용적을 기준하여 그 속에 우물물을 채워 무게의 표준으로 제정한 것이다. 밀도 변화가 많은 검은 기장이 아닌 우물물을 무게의 표준으로 정한 과학적인 사상은 프랑스의 미터법에서 물무게를 무게의 표준으로 제정한 시기보다 약 370년이나 앞섰다. 황종율관은 황종척으로 길이 9치, 내경 3푼4리6모관으로, 여기에 우물물의 평균온도에 가까운 섭씨 10도의 물을 채운다면 그 무게가 35.307g이 된다. 이 뮈게를 기준으로 하면 무게 표준인 1근이 641.949g이 된다. 따라서 이 1근은 통일신라부터 통용되어 온 무게라 볼 수 있다.
5) 세종대에서 한말 사이의 도량형
가. 준수척고 갑술척 - 고려의 삼등전은 하등전척을 기준하여 양전이 실시되었으며 1444년에 개정된 6등전을 일등전척의 하나로서 양전이 실시되었다. 이 일등전척의 하나로서 양전이 실시되었다. 이 일등전척의 길이는 앞에서 밝힌 것과 같이 주척 4척7촌7푼5리이었으므로 99.296㎝이다. 이 척도를 준수척이라 하였다. 세종 때 고정, 통일된 표준척을 정확히 보존하기 위하여 표준척을 만들어 각 관부와 명산에 보관하게 하였으나 표준척에 대한 인식부족과 관리 소흘로 표준척의 보관이 허술하였다. 또한 임진왜란 때에 문화재의 심한 파괴로 모든 표준척이 없어져 준수척은 호조에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임진왜란으로 문란했던 전답의 넓이를 바로 잡기 위하여 1634년(인조 12)에 호조에서 전국을 양전하기 위한 양전척을 만들었다. 이때 호조에는 표준이 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고 판각(板刻) 하나가 있어서 그것을 기준하여 일등양전척을 만들어 전국에 보내어 양전하게 하였다. 얼마 뒤 호남의 한 창고 속에서 발견된 준수척과 비교한 결과 이때 만들어 양전하게한 척도는 준수척보다 포백척으로 1치가 길어 포백척으로 2.126척이라야 할 것이 2.226척이 되었다. 이 척도를 갑술양전척이라 하였다.
나. 1740년의 도량형 고정 - 세종은 통일된 도량형의 표준량을 길이 계승시키기 위하여
1446년에 동제영조척과 포백척을 만들어 각 관부에 보냈으나 관원들의 관리소흘과 임진왜란으로 전부 없어지고 삼척부의 포백척 하나만 남았다. 1740년(영조 16) 우의정 유척기는 밝고 올바른 정치는 정확하게 통일된 도량형제도의 실시에 있음을 주청하여 삼척부의 세종 때 포백척의 부본을 만들어 그것을 기준하여 세종 때 각종 표준척도를 재현하여 실시하게 하였다. 재현된 각종 척도는, 황종척 1척 = 주척 : 1.500척, 영조척 : 1.001척과 같다고 하였다. 이때 고정된 각종 척도 중 포백척이 들어 있지 않았던 이유는 당시 삼척에서 목제부본 포백척을 만들어왔기 때문에 새로이 만들 필요가 없었음에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한가지 주목을 끌게 하는 것은 황종척 1척의 길이를 세종 황종척 9촌 길이인 황종율관장을 취한 점이다. 이때 제정된 각종 척도의 길이는 분 단위까지는 세종척도들과 일치하고 있어 근사하게 재현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영조 때와 그 이후의 도량형제도의 변천을 보면 이러한 개정은 전국적으로 실시되지 못했음이 명백하다. 이는 유척기가 관직에서 물러나자 이것을 강력히 추진시키려는 관리가 없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양생 > 우리술과 식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술 익는 마을 가을 향기도 솔솔 (0) | 2011.01.26 |
---|---|
[스크랩] 전통주만들기 (0) | 2010.11.15 |
도량형 통일과 미터법의 도입 (0) | 2010.11.15 |
도량형(上) (0) | 2010.11.15 |
옛 문헌상의 전통술 제조비법 전통주,약용주 (0) | 2010.11.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