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량형(上)
도량형은 길이·양·무게 따위를 재는 기구 및 단위법을 이르는 말로 度는 길이를 量은 부피를, 衡은 무게를 나타낸다. 도량형의 기원은 인류가 물물교환을 시작한 시점이며, 길이로서는 손가락, 손바닥 한 뼘·두 뼘 등, 부피로서는 양 손바닥으로 가득히 담을 수 있는 양으로서의 한 줌·두 줌 등 신체 일부를 기준으로 삼았다.
문자와 함께 수량의 개념은 중요한 문화의 척도이다. 국가로 진화함에 따라 사회구조가 복잡해질수록 세·공납(貢納) 또는 건축·토목공사가 발달하자 도량형 제도 역시 복잡해지면서 제도화됐다. 중국을 원류로 하는 척관법(尺貫法), 중근동에서 원류되어 서유럽으로 확대되어 오늘날까지 영국이나 미국 등지에서 사용되고 있는 야드-파운드법, 1840년경에 프랑스에서 만든 미터법은 오늘날까지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는 도량형 제도의 대표적인 예이다.
국제미터협약이 체결된 이후 세계 각국은 미터법 통일사업을 추진해 현재 미국과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의 국가가 미터법을 사용하고 있다. 한국은 중국의 영향을 받아 오래 전부터 중국에 기원을 둔 척관법을 사용했으나 시대에 따라 우리 고유의 것으로 개발했다. 척관법은 길이의 기본단위로 자 또는 척(尺), 무게의 기본단위로 관(貫)이 있으며, 유도단위인 면적의 단위는 평(坪) 또는 보(步), 부피의 단위는 되 또는 승(升)이 있다. 삼국 시대 이전부터 도량형제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확실한 것은 조선 왕조에 들어, 과학사상이 획기적 발전을 이룬 세종 때에 도량형의 기본틀이 확립됐다.
한국의 도량형은 음악에서 비롯
세종은 고유의 음악을 장려하기 위한 첫 단계로 박연으로 하여금 우리 음률의 기본음, 즉 황종음(黃鐘音)을 정하게 했다. 당시 음을 조율할 때는 기본율인 황종률(黃鐘律)의 관악기, 즉 황종률관(黃鐘律管)을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황종률관의 길이를 결정하는 것이 중요했다. 박연은 황종률관의 길이를 결정하기 위해 황종척을 고안하고, 오랜 연구 끝에 황해도 해주에서 나는 기장 중 중간 것을 골라 100알을 나란히 쌓아 그 길이를 황종척(黃鐘尺) 1척으로 삼았다.‘악학궤범(樂學軌範)’에 기록된 황종관(黃鐘管)의 크기는 길이 9촌, 지름 9분, 부피 810분이고, 기장 1200알이 들어갈 수 있었다. 황종관은 부피와 무게를 재는 단위의 기준이기도 했다. 즉, 기장 1200알이 들어가는 관의 부피를 1작(勺)으로 정하고, 10작을 1홉, 10홉을 1되, 10되를 1말로 정했으며, 15말을 작은 섬, 20말을 큰 섬으로 정했다. 또한 무게의 단위는 기장 1200알이 들어가는 황종관에 우물물을 가득 채워 그 물 무게를 88분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10리(釐)를 1분, 10분을 1전(錢), 10전을 1량(兩), 16량을 1근(斤)으로 하였다. 황종척은 조선 도량형의 원기(原器 prototype)로서 이를 기준으로 주척(周尺), 영조척(營造尺), 예기척(禮器尺) 포백척(布帛尺) 등이 만들어졌다. 이때 만들어진 척들의 실제 길이는 당시의 유물이 현재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히 파악할 수 없으나 1척은 34.72cm로 추정되고 있다.
한국의 도량형이 음악에서 비롯된다는 점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다.포백척을 마지막으로 세종대의 도량형은 비로소 국가표준을 정했다. 이로인해 여러 가지 과학기술 분야의 정확한 측정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세종 때 이루어진 국가표준의 도량형 제도는 성종 대에 이르러 ‘경국대전(經國大典)’이 편찬되면서 법제화됐다. 임진왜란에 국가 표준 척도기기가 없어져 혼란해졌다가 영조 때에 포백척이 발견되어 이를 중심으로 복원된 이후 서구식 도량형이 유입됐다.
길이를 재는 기구들 중 남겨진 것은 주척(周尺), 영조척(營造尺), 황종척(黃鐘尺), 예기척(禮器尺), 포백척(布帛尺) 등인데 이들은 대부분 조선 시대 도량형의 기틀을 마련한 세종 대 이후의 것들로 추정된다.
주척
모든 자의 기준이 되는 자로서, 주로 토지와 도로의 측량과 사격장의 보법(步法) 등에 사용하던 자로, 이 이름은 중국의 모든 문물제도가 주대(周代)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유가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세종 때 박연이 만든 황종척을 기준으로 다시 만들어 사용했다.
그 이후에도 조선 시대의 주척은 세종, 세조, 숙종, 영조, 정조, 순조 대에 개정 또는 복구되어 사용됐다. 세종 대의 주척 1척은 20.81cm, 영조대의 주척 1척은 20.83cm이라고 알려져 있다.
황종척
국악의 기본음인 황종음을 낼 수 있는 황종률관의 길이를 결정하는데 사용된 자. 세종 때 만들어진 황종척의 길이는 1척이 34.72cm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영조척
무기와 형구(刑具)의 제조, 성곽의 축조, 교량과 도로의 축조, 건축, 선박제조, 차량제조 등에 사용하는 자이다. 조선 시대에는 주로 궁실을 건조하는 데 사용돼고 말이나 되와 같은 부피를 재는 기기를 만드는 기준척으로 사용됐다. 세종 때의 영조척의 길이는 1척이 31.24cm였으며, 영조 때의 영조척은 1척이 31.22cm였다고 한다.
포백척
일명 침척(針尺)이라고도 불렸으며 포복 등의 무역과 의복 제조에 사용했던 자이다. 포백척의 길이는 1척이 46.73cm였다고 한다.
기타
이밖에 관혼상제 예식에 필요한 기구들을 만들 때 사용했던 화각척, 정조가 전국의 지방관들에게 농사 업무에 최선을 다하라는 표시로 2월 초하루에 나눠주던 중화척 등이 유물로 남아 있다.
세종때 국가표준 量器 마련
부피
과거 국가경제에서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 생산물을 공정히 측정할 수 있는 국가표준의 양기(量器)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했다.
생산물의 부피를 재는 제도의 확립은 길이, 무게와 함께 세종 7년(1425) 황종관이 만들어지면서 이뤄졌다. 표준화된 영조척을 기준으로 다음과 같이 공식화했다. 큰 섬은 길이가 2척, 넓이가 1척 1촌 2분, 깊이가 1척 7촌 5분, 용적이 3,930촌이었다.
가장 작은 단위인 홉(合)은 길이가 2촌, 넓이가 7분, 깊이가 1촌 4분, 용적이 1촌 9분 6리였다. 작은 섬(용적 2,940촌), 말(용적 196촌), 되(용적 19촌 6분)도 모두 이같은 표준이 정해져 있었다.
양기의 표준은 보통 구리로 만들었다. ‘만기요람(萬機要覽)’에 의하면 세종대 이후에도 구리로 만든 표준 양기를 제작해서 전국에 보급했던 것 같다.
보통 실제로 사용하는 되나 말은 나무로 만들었는데, 각 지방에서는 세금을 거둬들이는 창에서 보관하는 구리로 된 표준양기를 기준으로 봄, 가을 두 차례의 검정을 거쳐 낙인(烙印)을 찍어 사용했다.
공식적으로 찍은 낙인이 어떤 부호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현재 남겨진 낙인은 ‘평(平)’자와 ‘관(官)’자 두 가지가 있다.
현재 직육면체, 원통형으로 양쪽에 손잡이가 달린 말, 직육면체 모양의 되가 남아 있다.
무게
무게를 재는 저울의 표준화는 제일 나중에 이뤄졌다. 세종 초기에 도량형의 국가 표준이 마련되면서 무게를 재는 제도의 표준화도 이루어졌다.
‘악학궤범’에 따르면 황종관에 우물물을 가득 채워 그 물 무게를 88푼(分)으로 정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기준으로 10리(釐)를 1푼, 10푼을 1돈(錢), 10돈을 1냥(兩), 16냥을 1근(斤)으로 정했다. 또한 대칭(大稱)은 100근, 중칭(中稱)은 30근 혹은 7근, 소칭(小稱)은 3근 혹은 1근으로 정하였다.
이 제도는 ‘경국대전’에서 법제화 돼 조선 시기 동안 표준이 됐다.
무게를 재는 것은 길이와 부피의 표준화작업에 비해 비교적 관리가 허술하지만 금·은이나 인삼 등의 무역에 필요한 저울은 국가가 강력하게 관리했다.
‘만기요람’에 의하면 강계지역에서 體蔘과 尾蔘을 재는 저울과 동래 지역에서 禮單蔘을 재는 저울도 모두 호조에서 보관하고 있는 표준 저울에 의해 검정을 받도록 했다. 또한 의주에서 무역거래가 이루어질 때도 마찬가지다.
저울대, 천칭 저울과 추, 손저울과 추, 약저울, 휴대용 손저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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