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색/공동체마을탐방

[스크랩] (17)우리의 오래된 미래, 홍성 문당리 환경농업마을

비오동 2009. 10. 9. 14:20

   대안과 모색의 현장을 찾으며 이 시대 위기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신자유주의의 얼굴을 한 무한경쟁과 탐욕스러운 자본은 우리의 일상을 갉아먹고 겨우 명줄만 남은 공동체의 목을 누른다. 대안을 모색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우리 시대의 야만적 폭력성이 스스로를 자해하는 데까지 이른 현실을 걱정했다. 그런 점에서 지구촌을 강타한 미국발 금융위기가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 자본주의의 깊은 병증을 극적으로 드러내며 사회 혁신의 절박함을 경고한 것이다. 벼랑에 몰려 스스로를 성찰하는 계기를 얻는다면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다. 물질만능에 길들여진 삶을 돌이켜 도에 넘친 욕망을 다스리고 풍요의 유혹으로부터 헤어날 때 세상은 다시 희망을 노래할 수 있지 않을까. 다섯 달 동안의 여정을 통해 우리의 미래를 구원할 지속가능한 세상은 첨단산업과 금융이 아니라 생명에 뿌리박고 있는 농업에 의해 이뤄질 것이란 확신을 얻었다. 대안과 모색의 마지막 발길을 충청남도 홍성군 홍동면 문당리 홍성환경농업마을로 향했다. 그곳은 한국 환경농업의 메카이자 우리의 오래된 미래이기도 했다.

 

 

 

   홍성으로 가는 길목이 분주했다. 수도권의 위성도시로 떠오른 아산은 마치 공사판을 방불케 했다. 완공을 앞둔 대규모 아파트단지와 널찍한 고속화도로, 팽창하는 도시의 탐욕은 거침이 없다. 농민들의 땅은 잠식당하고 주체할 수 없는 물신만이 폭발할 따름이었다. 홍성으로 향하는 버스 창밖엔 어두운 들판이 뒤척이고 있었다.
   문당리 홍성환경농업마을은 홍성읍에서 택시로 20분 거리에 있었다. 환경교육관에 닿자 이 마을의 지도자 주형로(50) 씨가 반갑게 맞아준다. 솔숲에 둘러싸인 250여 평의 환경농업교육관은 문당리의 심장이자 한국 농업의 미래이다. 이곳에서 농민과 소비자가 도농이 상생하는 환경농업의 가치를 배운다. 가을걷이축제 준비를 돕기 위해 지원나온 대학생 자원봉사자들이 일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숙소인 방문자센터에 여장을 풀고 앞이 툭 터진 베란다로 나와 깊은 호흡을 했다. 외등 불빛이 희미하게 부서지는 들판이 눈앞에 찼다. 솔향기와 함께 가을바람에 실려온 곡식 무르익는 들판의 냄새, 거름냄새가 구수했다. 
  

 

   쌀과 나눔이 주제가 된 가을축제

 

   개천절 아침, 환경교육관에는 마을 주민들이 축제를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주먹밥 재료와 떡을 나르고, 체험행사를 위한 소품들이 마을 행사장 곳곳으로 보내졌다. 교육관 마당에서 내려다본 마을은 옅은 안개 속에 잠겨 있었다. 들 건너편으로 '2008년 가을걷이 나눔의 축제' 주행사장인 전통가옥체험관이 눈에 들어왔다. 앞마당엔 무대가 꾸며지고 의자 수백 개의 의자가 가지런히 열을 지어 있었다. 주변의 환경농업역사관, 황토찜질방, 노인회관 등 근사한 건물들이 아담한 풍력발전기들과 잘 어울린다. 
  

 

 

 안개가 걷히자 마을 모습은 또렷하게 들어왔다. 들판과 마을시설 곳곳에 설치된 문패 만들기, 흑미 염색, 투호놀이, 널뛰기, 환경·먹거리 영상물보기, 메뚜기 잡기, 허수아비 옷입히기, 손모내기, 떡매 치기, 대체에너지 실험, 쌀겨비누 만들기, 소 먹이주기 등 체험코너와 인절미와 식혜, 돼지고기·부침개와 막걸리 등 먹을거리 코너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날 문당리 가을걷이 축제를 찾아올 손님은 도시 소비자들로 주로 생협회원들이다. 10시가 넘어서자 철도생협, 한겨레초록생협, 부천생협 등 깃발과 배지를 단 도시 소비자 생협회원들이 줄을 지어 마을로 들어선다. 전국 각지에서 온 수십 대의 버스와 자가용이 마을입구 도로에 줄지어 장관을 이룬다. 이날 축제에 참가한 외지인들은 1600명이 넘었다.
   이번 축제의 화두는 쌀. 마을 입구에서 등록을 하면 한 사람앞에 500g들이 홍미 한 봉지가 나눠졌다. 이 쌀 한 봉지가 축제에 사용할 화폐. 참가자들은 쌀을 한 줌씩 내놓고 주먹밥과 떡, 돼지고기와 막걸리, 음료수를 사먹는다. 쌀은 이날 운송수단인 트랙터마차 요금과 각종 체험의 대가로도 사용된다. 천대받고 멸시받아온 쌀이 이날 행사의 주인공이 된 것. 전통가옥체험관 한쪽엔 나눔의 항아리가 놓여 있었다. 어려운 이웃에 전할 쌀을 십시일반 걷기 위해서다. 오후 5시 행사가 모두 끝나고 귀가길에 오른 손님들의 빈 봉투에 다시 쌀을 채워준다. 나눔의 항아리에 남은 쌀을 다 기부한 기자의 빈 봉투는 온전한 한 봉지의 쌀로 되돌아왔고, 절반을 쓴 이에게는 절반만큼 다시 채워졌다. 나누는 삶의 귀중함을 인식시킨 마지막 반전이 인상적이었다.
  

 

 

 

   주형로 씨는 모심기철과 수확철 해마다 두 차례씩 열리는 오리쌀 축제가 도시 소비자와 농촌 생산자를 잇는 가교라고 말한다. "얼굴을 맞대 음식을 같이 먹고, 공연을 함께 보면서 마음을 잇습니다. 이런 자리를 통해 소비자와 생산자가 먹을거리 공동체라는 사실을 깨닫고 신뢰를 구축합니다. 문당리에는 한 해 2만여 명의 외지 농민과 소비자들이 찾아 음식과 농업문제를 토론하고 고민합니다. 환경농업교육관과 마을축제는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하고 건강한 밥상을 모색하는 가교입니다. 무엇보다 도시의 아이들이 이곳에서 흙을 밟고 들판을 달리는 모습을 보며 미래의 희망을 확신합니다." 
  

 

 

   30년 오리농법과 자립영농의 성과

 

   문당리는 친환경 유기농업의 메카이다. 오리농법으로 대표되는 이곳 환경농업은 지난 30년간 홍동면 전체로, 전국 곳곳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작년 노무현 전대통령이 귀향한 김해 봉하마을의 오리영농도 이곳에서 배워간 것이다. 중국 등 해외까지 명성이 자자한 문당리 환경농법은 1979년 스물 한 살의 젊은 농사꾼 주형로 씨가 앞장서서 일궈낸 성과이다. 오리농법으로 생산되는 이곳의 쌀은 1998년부터 무농약농산물 인증을 시작으로 유기농산물 인증까지 받았다. 올 가을 문당리를 비롯한 홍동면 일대 250만 평의 논에서 오리농법 벼를 거둬들인다.
   한국의 대표 농촌 문당리가 이룬 성과의 배경에는 자발적이고 진취적인 농민상이 자리잡고 있다. 이들의 자립정신은 정부의 지원에 기대지 않는다. 50여 주민들이 십시일반으로 지난 10여 년간 12억 원이란 거액의 마을기금을 마련했다. 주민들은 기금으로 3000여 평의 땅을 사서 직접 3만 개의 벽돌을 찍어 환경농업교육관을 지었다. 그게 2000년 12월의 일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문당리 농민들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불변의 진리를 체득했다. 
  

 

 

   이들의 자발성은 학교급식에까지 이어져 홍성군의 친환경급식조례 제정의 결정적 계기가 된다. 주민들이 홍동면에 있는 각급 학교에 유기농급식을 제안하면서 일반급식과의 차액을 스스로 부담했다. 이런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태도가 관을 움직인 것이다. 정부지원으로 하는 사업에도 반드시 마을기금이나 주민의 돈을 같이 투자한다. 자신의 돈이 들어가면 일에 대한 관심도부터 달라진다고 한다. 대부분 농촌지원사업이 실패하는 이유가 공돈이라는 인식 때문이라는 주형로 씨의 분석이 설득력 있어 보인다.
  

   100년 뒤를 내다보는 농촌마을

   문당리는 100년 미래의 계획을 갖고 있다. 작은 농촌마을이 한 세기의 청사진을 갖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2000년 겨울 환경농업교육관을 주민들이 직접 지으면서 미래 설계의 필요성을 공감했다고 한다. 이들의 100년 계획의 뒤에는 공동체 정신이 뒷받침하고 있다. 마을 공동재산을 많이 만들고 끊임없이 민주적인 토론을 해온 결과물이기도 하다.
   환경농업의 미래를 담은 '21세기 문당리 발전 백년계획'은 주민들과 서울대 환경대학원, 녹색연합 등이 함께 고민하며 만들었다. 230여 페이지에 달하는 책자로 엮어진 백년대계에는 '넉넉한 문당리, 오순도순한 문당리, 자연과 사람이 건강한 문당리'로 이들의 꿈이 집약되어 있었다. 2030년까지 지속가능한 마을 기반구축을 목표로 한 이들의 청사진은 삶의 질 개선, 두레공동체의 회복, 세대의 연속, 고용창출 및 자립경제 완성, 도시민의 고향 등 구체적인 목표와 정밀한 실천계획으로 정리돼 있다.
   먼저 넉넉한 문당리는 경제적 자립을 목표로 한다. 오리농법으로 재배한 쌀을 특화하고, 한약원 한우원 종합가공공장 등 새로운 소득원을 만든다. 환경농업교육관을 중심으로 녹색관광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인터넷을 통해 도시와 교류의 폭을 넓히고 지구촌까지 확대한다는 야심찬 계획도 갖고 있다. 
  

 

 

마을도서관과 농업박물관 등을 만들어 평생교육 기반을 구축하고 전통문화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힌다. 젊은 농민의 귀농을 적극 유치해 10, 20, 30대의 인구를 늘리는 중장기 계획도 있다. 마을 한약원과 인근 의료시설을 연계해 평생의료 체계를 확보하고 농번기의 공동식당을 운영하는 등 두레공동체를 되살린다는 계획도 세우고 있다.
   들판 어귀에는 자연정화 연못을 설치해 생활오수를 처리하고 하천변 식생을 자연적으로 형성하는 지역 생태계 살리기 계획도 있다. 태양열과 풍력, 바이오가스를 이용한 자연에너지의 효율적 사용과 태양열패시브 주택의 개발도 활발하게 추진되고 있다. 
  

 

 

   '위대한 평민' 길러내는 풀무학교

 

  문당리 환경농업마을의 뿌리에는 풀무학교가 있다. 올해 개교 50년을 맞은 풀무학교는 대안학교로 잘 알려져 있지만 실은 건강한 농부를 키우는 농업학교이다. 문당리와 조금 떨어진 홍동면 소재지에 있는 이 학교는 20여 명의 교사와 70여 명의 학생이 우리 농촌의 미래를 고민하며 땀을 흘리고 있다. 몇해 전에는 전공부가 생겨 20여 명의 학생들이 유기농업에 대한 전문적 학문을 배우고 연구하고 있다.
   1958년 이찬갑 주옥로 선생에 의해 설립된 풀무학교는 여느 학교와 달리 지역을 섬길 인재를 기르는 것이 교육의 목표이다. 좋은 대학을 진학하고 출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지역에 정착해 농사를 지으며 더불어 살 평민을 길러 온 것이다. 그 동안 1000여 명의 '위대한 평민'을 배출해 낸 풀무학교는 홍성의 브레인이자 심장이다.
   풀무학교 출신들은 홍동면 일대에 제빵공장 비료공장 유기농창고 건조장 우유공장에서부터 조합원 1500여 명의 신협, 연매출 140억 원의 생협, 환경농업교육관, 미래세대 60여 명이 뛰어노는 어린이집 등을 만들고 꾸려왔다. 황토찜질방도 만들었고 무인 헌책방과 출판사, 마을 소식지도 내고 있다. 자급자족과 지속가능한 토대를 이들이 다지고 있는 것이다.
   풀무학교의 실사구시 교육정신은 졸업(풀무학교는 졸업을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창업으로 부른다) 때 쓰는 창업논문에 잘 나타난다. 창업논문은 창업생의 청사진이기도 하다. 전국 최초로 문당리에 오리농법을 도입해 유기농업을 선도한 주형로 씨는 '이 지역에 유기농업을 어떻게 정착시킬 것인가'라는 주제로 창업논문을 썼다. 우리나라 첫 지역신문인 홍성신문을 창간했던 이번영 씨의 창업논문은 '지역신문 만들기'를 다뤘다. 풀무학교라는 온전한 배움터가 '생각하는 농민, 준비하는 마을' 문당리의 밑거름이 된 것이 분명하다.
   "환경농업마을 문당리가 우리 농촌의 미래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곳에서 유기소농의 성공적 정착을 보여 줄 것입니다. 성장지상주의에 모든 것이 맞춰진 시장만능의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공동체를 회복하고 인간다운 삶을 추구해 가는지 지켜봐 주십시오." 주형로 씨의 다짐에 갑자기 100년 뒤의 문당리가 머리 속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출처 : 장병윤의 느티나무 그늘
글쓴이 : 느티나무 그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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