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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4) 황무지에 일군 이상향 오로빌 (상)열린 공동체

비오동 2009. 10. 9. 14:18

 왜 오로빌인가. 남인도 최대의 도시 첸나이 마드라스공항에서 오로빌까지 세 시간, 어스름이 내린 벵갈의 바다가 차창으로 부딪쳐오는 150㎞의 해변도로를 달리면서도 선뜻 답이 나오질 않았다. 인종과 종교를 초월해서 만든 공동체, 인류의 영적 진화를 믿으면서 새로운 대안을 모색 중인 오로빌, 그곳에서 무엇을 구할 수 있을까. 공항을 빠져나오면서 숨이 턱 막히던 후텁지근한 더위가 오로빌로 들어서면서 말끔히 가셨다. 가슴을 파고드는 숲과 흙 냄새에 체증이 가라앉으며 머리가 한결 가벼워졌다. 어둠의 장막을 걷으며 숲길을 달려 밤 늦게서야 숙소에 도착했다. 만 하루 동안의 여독, 쓰러지듯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새벽 새소리와 서늘한 숲의 기운에 눈을 떴을 때, 창밖으로 펼쳐진 거대한 녹음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짧은 찰나에 오로빌의 존재감이 따뜻하게 다가왔다. 특별한 이들이 사는 오로빌의 첫 인상이 다소 견고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예상과 달리 따뜻함이 앞섰다. 오로빌의 숲과 공기가 그렇고, 먼지 풀썩거리는 황톳길과 그 위를 스쿠터로 달리며 미소를 보내는 오로빌리언들이 그랬다. 오로빌은 낯선이를 감싸안는 따뜻한 포용력이기도 했다.

 

 

 

 

 인간의식의 진보를 꿈꾸는 실험장

 1968년 2월 28일, 남인도 타밀나두주 코로만델 해변의 황무지에서 매우 의미 있는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세계를 향해 가슴을 연 새로운 세상, 오로빌의 출발을 선포하는 순간이었다. 징소리와 함께 음악이 흘러나오고 인근 도시 퐁디셰리 오로빈도 아쉬람에 은거하고 있는 마더의 육성이 전파를 통해 이어졌다.

 "오로빌은 선의를 가진 모든 사람을 환영합니다. 더 높고 진실한 삶을 열망하며 진보를 갈구하는 모든 이를 오로빌에 초대합니다." 인도 23개 주와 세계 124개 국의 남녀 청소년이 대표가 되어 자기 나라에서 가져온 흙을 특별히 마련한 항아리에 부었다.

 "오로빌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전체 인류의 것이다. 끝없는 교육의 장, 지속적 발전의 장, 과거와 미래를 잇는 가교가 되고자 한다. 인류의 일체성을 실질적으로 구현하는 살아 있는 본보기를 만들기 위한 물질적, 정신적 탐구의 장이 될 것이다." 이날 모두 4장으로 된 오로빌헌장은 마더의 육성으로 중계되었으며, 그 목소리는 오로빌의 정신적 주춧돌이 되었고 앞으로도 이정표 역할을 계속할 것이다.

 전 세계에서 모여든 5000여 명의 인류 대표에게 오로빌이 영적 진화의 추구를 선포한 지 40년. 그동안 오로빌은 종교와 이념, 국적을 초월하여 진취적 조화 속에서 평화로운 국제도시를 이루며 꿈을 위해 한 발 한 발 전진하고 있다. 지금은 온통 숲으로 뒤덮인 이곳도 40년 전엔 황량한 벌판이었다. 남인도의 작열하는 태양 아래 황토가 힘겹게 몸을 뒤척이는 시뻘건 평원. 팔미라야자나무와 니임나무, 그리고 먼지를 뒤집어쓴 관목덤불만 드문드문 보이는 거친 땅에서 인류의 새로운 실험이 시작된 것이다.

 오로빌은 근대 인도의 위대한 사상가 스리 오로빈도(1872~1950)와 그의 영적 동반자인 마더(Mother : 영적으로 고매한 여성에 대한 인도식 존칭) 미라 알파사(1978~1973)의 정신이 스며 있다. 영국의 식민지 치하에서 민족운동을 펼치던 오로빈도는 체포돼 감옥생활을 했고, 그때 몇 차례의 영적 체험을 통해 진리에 대한 확신을 가졌다.

 오로빈도와 마더는 끊임없는 자기 성찰을 통해 마음을 초월한 새로운 의식을 구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우주가 물질로부터 생명을 진화시켰고 생명은 인간에 이르러 의식을 진화시켰는데, 이것은 진화의 끝이 아니라 과도기적인 중간단계일 뿐이다. 그 다음 단계에는 초의식의 출현한다. 이 초의식은 인간은 개체성과 일체성을 동시에 자각하는 전체이자 개체로서 새로운 세계를 건설할 것이다'. 오로빈도와 마더는 새로운 의식의 출현에 대해 확신했고, 마더는 이에 대비하기 위해서 척박한 땅에 공동체를 건설한 것이다.

 

 43개국 2000여 명이 일구는 세계문화

 오로빌은 오로빌헌장이 천명한 것처럼 인류의 일체성을 구현하는 살아 움직이는 실험장이다. 세계인은 이곳에서 종교와 정치적 신념, 국적을 초월하여 조화를 이루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국제도시를 만들었다. 9월 현재 오로빌에는 뉴커머(1년간 거주가 허락된 예비주민)를 포함해서 43개 국 2023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인도인이 866명으로 가장 많고, 프랑스인 301명, 독일인 226명, 이탈리아인 100명 등이다. 한국인은 10가구 24명이 살고 있다.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이들이 지난 40년간 이곳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과 존재양식을 창조하기 위해 열정을 쏟아 왔다.

 인터내셔널 존에 있는 유니티 파빌리언을 찾았다. 유니티 파빌리언은 주민들이 출신 국가와 민족의 문화적 역량을 잘 발현할 수 있게 도움을 주고 조화로운 관계를 이룰 수 있도록 지원하는 역할을 한다. 이곳의 담당자인 루슬란(카자흐스탄)과 시바야(스위스)는 "인터내셔널 존은 43개 국 출신의 주민들이 자기 나라를 소개할 수 있는 곳으로 조화와 평화가 미덕"이라며 "오로빌리언은 자국의 파빌리언(문화관)을 통해 모국이 인류의 지구적 진화에 공헌한 바를 표현할 수 있다"고 말한다.

 다양한 문화적 특징을 바탕으로 인류 공동체의 실현을 위한 국가별 파빌리언 설립이 진행되고 있다. 인터내셔널 존에는 이미 세 개의 파빌리언이 들어섰는데 인도의 파빌리언인 바라트니바스와 티베트 파빌리언, 미국 파빌리언 등이다. 국가별 파빌리언은 바라트니바스를 중심으로 대륙 단위로 원형으로 자리잡게 설계돼, 통일성과 다양성을 동시에 표현할 수 있도록 했다. 이들 건축은 각국 정부나 기업체의 도움을 받는데, 지금까지 15개 국의 인도주재 대사들이 관심을 표명했고 구체적 지원모임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한때 한국 거주자들에 의해 한국 파빌리언이 추진되었으나 지금은 소강 상태이다. 첸나이에 진출해 있는 현대자동차가 이곳에 한국 파빌리언을 짓는데 지원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성싶다.

 

 

 

 

   자유 속에 영혼을 키우는 전인 교육

 교육은 영적 진화를 향해 가는 과정이다. 따라서 오로빌의 교육은 끝없는 배움이다. 교육을 통해 지속적으로 진보하며 결코 늙지 않는 젊음의 장을 도모한다. 오로빌의 중등교육의 현장인 라스트 스쿨을 찾았다. 캠퍼스 한쪽 숲 그늘에서 딥티 교장과 마주앉았다. 그는 "교사는 제안할 뿐 강요해서는 안 된다. 부모나 교사가 원하는 틀 속에 아이를 두드려 넣는 생각은 야만적 폭력이라는 오로빈도의 생각이 교육의 지표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곳의 교육은 인간의 영성을 발전시키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인간의 자유정신을 존중하면서 영적 진보를 이루기 위한 토양을 제공한다. 오로빌 아이들은 자연 속에서 일체성을 추구하는 공동체의 다양한 문화와 만나며 독특한 품성을 키우고 있다.

 딥티 교장은 "고결한 정신은 교육을 통해 이룩될 수 있다. 교육은 끊임없는 배움의 장소를 제공하고, 우리는 교육을 통하여 끊임없이 전진해야 한다"며 진보란 끊임없는 자기성찰을 통해 신성의식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아울러 인류의 융합을 위해 각국의 특성과 문화를 잘 표현할 수 있게끔 역할을 하는 것이 교육의 기능이란다. 오로빌 자체가 교육의 장소이고, 모든 오로빌리언들이 진실을 구하고 진보를 향해 나아가는 학생들이었다.

 라스트 스쿨은 14~18세의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5년제 중등 과정이다. 교과는 역사 문화 언어 문학 철학 수학 과학에 다양한 예술과목을 배운다. 우리나라의 작은 대학 정도의 캠퍼스에 도서관과 체육관 등 각종 시설이 산재해 있다. 하지만 좋은 환경의 이 학교도 고민을 안고 있다. 현재 재학생이 7명으로 갈수록 숫자가 줄어든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 고민은 오로빌의 교육 전체가 안고 있는 문제인지도 모른다.

 이곳의 아이들은 라스트 스쿨에서의 수업이 현실적인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기피한다. 인근 도시 퐁디셰리의 프랑스계 사립학교에 진학하는 경우가 많다. 대학을 가기 위한 공부가 아이들의 현실적 욕구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대외적 학력을 인정 받을 수 있는 과목도 함께 공부하며 이곳 특유의 교육철학도 도모하는 퓨쳐 스쿨이 생겼다. 지금은 아이들 대부분이 그곳으로 진학한다.

 딥티 교장은 이야기 내내 오로빌의 초창기 정신이 스며든 교육정신이 변하는 것 같다며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어쨌거나 오로빌의 학교는 학생들의 온전한 발달을 도모하는 교육을 중시한다. 영혼과 정신뿐만 아니라, 육체의 측면까지 고른 성장을 위한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관계를 형성하는 숲속의 운동장

 문화구역의 숲속 깊숙이 데하샥티 종합운동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이들이 모여 운동하느라 시끌했다. 늦은 오후의 숲그늘 아래 미래세대들의 집단적 운동은 한마디로 경이였다. 1992년 문을 연 이곳은 축구 농구 핸드볼 풋살 배구 체조 소프트볼 하프테니스장 등 체육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6~16세에 이르는 160여 명의 아이들이 이곳에서 1주일에 5일, 오후 3시45분에서 5시15분까지 1시간30분씩 운동을 한다. 하프테니스 코트에선 예닐곱 살쯤 되는 아이들이 테니스의 기초를 배우고 있었다. 축구장에선 10대 청소년들이 축구를 하고, 핸드볼 경기장에선 코치의 지도 아래 슛하기 훈련이 한창이었다. 가끔씩 급수대를 찾은 아이들이 땀을 닦으며 레몬차와 삶은 콩을 한 주먹씩 입에 털어넣고 다시 운동장으로 뛰어나갔다.

 오로빌은 청소년의 건전하고 고른 성장을 위해 다양한 체육프로그램을 운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활동은 단순한 육체적 운동만이 아니다. 함께 운동하면서 관계를 형성하고 자신의 위치를 인식하며 사회성을 기른다. 단체정신과 게임과 경쟁에 임하는 올바른 태도 등 덕성도 키운다.

 운영을 맡고 있는 이브(캐나다)는 "이곳의 활동은 아이들의 정서적 발달에 도움을 주는 데 우선을 두고 있다. 무엇보다 서로 몸을 부대끼며 관계를 맺는 데 무게를 둔다"고 한다. 이곳에서 한 해 두 차례 올림픽이 열린다. 한 번은 단체게임이고 한번은 달리기 높이뛰기 등 개인경기로 열린다. 특히 팀올림픽을 중시하는데, 팀은 다양한 연령층의 아이들로 구성된다. 이런 팀 구성을 통해 작은아이들과 큰아이들이 서로 교감할 수 있게 한다. 자연스럽게 서로 가르치고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데하샥티에는 15명의 자원봉사자가 활동하고 있는데, 매일 퇴근 뒤 이곳에서 아이들과 함께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관계의 중요성을 몸을 통해 발견한다.

 

 

 

  오로빌서 만난 한국방문객들

 

 비지터센터 카페테리아에서 한국인 방문객들을 만났다. 직장을 그만두고 머리를 식히려 온 여성, 복학을 앞두고 충전을 하러 온 대학생, 대학 졸업반 여학생 등이었다. 이들은 오로빌에 매료되어 다음 일정을 접었다고 한다. 무엇이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모든 가치가 돈으로 귀결되는 세상, 타인의 무관심마저 부담스러웠던 나날들이 여기에는 없다. 정신없이 돌아가던 일상을 벗고 긴장의 끈을 늦추고, 가슴 깊숙한 곳으로부터 차오르는 행복을 음미한다.

 정재선(36,오른쪽서 두번째) 씨는 얼마 전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그만뒀다. 끊임없이 비교하고 경쟁하는 소모적인 생활이 스스로를 갉아 먹는 것 같아 힘겨웠다고 한다. 우연히 오로빌에 대한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일주일을 갓 넘긴 그는 이곳에서 뉴커머 생활까지 생각하고 있다. 김봉철(22,왼쪽서 두번째) 씨는 지난달 이곳으로 왔다. 군대를 제대한 뒤 복학을 앞두고 외국어 공부도 할 겸 여행길에 올랐다. 인도 여행 중 들렀다가 이곳의 매력에 흠뻑 빠져 주저앉았다. 날마다 다양한 국적을 가진 이들을 대할 수 있는 것도 이곳에서 누리는 즐거움이라고 한다.

 대학 4학년인 진사랑(24) 씨는 열일곱 고교 시절에 우연히 TV를 통해 이곳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았다고 한다. 수험공부를 하면서도 머리속 한켠에는 그날 본 영상이 깊이 남은 채 이상향이 되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이곳을 찾은 그의 얼굴은 행복감으로 빛났다. 그는 "인종과 문화적 장벽이 없는 열린 사회가 마음을 사로잡는다"고 한다.

 이들은 오로빌의 교통수단인 오토바이를 타고 숲그늘 속 황톳길을 달리면서 육신뿐만 아니라 영혼의 자유를 만끽한다. 과도한 소비와 경쟁에 찌든 삶을 이곳에서 위로받고 새로운 기운으로 가득 채우는 하루하루가 가슴 벅차다고 입을 모은다. 느긋한 여유와 자유 속에서 정신을 더욱 명료하게 가다듬는다.

출처 : 장병윤의 느티나무 그늘
글쓴이 : 느티나무 그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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