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해바라기가 된 눈 먼 처녀
소바짐 마을에 눈이 먼 처녀가 홀어머니와 살았다. 어머니는 그물 짜는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바닷가 절벽위에 호롱불이 켜진 처녀의 집은 마치 등대 같았다. 처녀는 거미줄만큼 가는 실을 밤새 더듬어 골랐다. 어머니는 그것을 가지고 낮에 바닷가로 나가 그물을 짰다.
천지가 조용한 한밤중, 어머니는 깊은 잠에 빠졌고 처녀는 실을 고르며 상상에 빠졌다. 실은 어떤 색일까. 이 실로 짠 그물은 어떤 모양일까. 그물로 고기를 잡는 사람은 어떻게 생겼을까. 일곱 살에 실명이 되어 바닷가로 이사를 온 처녀는 그때까지 본 세상 기억이 전부였다. 이런 상상에 빠져있는 처녀의 귀에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까지 외딴 바위 위에 있는 처녀의 집을 찾아온 손님은 거의 없었다.
“누구신지요?”
처녀가 문을 열었다. 사방이 조용했다. 좁은 마루에 물만 흥건하게 고여 있었다. 문을 닫고 실을 고르면 다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밤새도록 처녀는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다가 날이 샜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밤마다 계속 되었다.
처녀는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누굴까 상상에 빠졌다. 한밤중에만 찾아와 마루가 흥건하도록 눈물을 흘리고 가는 그 사람은 분명 무슨 사연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언젠가는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으며 방 안으로 들어올 것을 기다리며 처녀는 행복해 했다. 처음으로 외롭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밤마다 문 앞에서 서성이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자 하나가 아닌 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녀의 생일날이 되었다. 어머니는 처녀에게 한복 한 벌을 사다 주었다. 하얀 저고리에 보라색 치마였다. 어머니는 처녀의 검은 머리를 길게 땋아 내리고 치마저고리를 입혔다. 흰 저고리와 보라색 치마는 처녀의 흰 피부를 더 돋보이게 했다. 눈물을 억지로 참으며 처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처녀는 낮에 문을 열고 나와 바다를 향해 앉아 있는 날이 잦아졌다. 바다가 보이지는 않아도 바다를 향해 앉으면 누군가에게 안긴 듯 편안해했다. 간간이 밤에도 바다를 향해 앉아 있었다. 밤늦게까지 앉아 실을 고르다가 지루해지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밤마다 문을 두드리는 그를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를 상상하는 횟수가 점점 많아졌다. 어느 날, 처녀는 용기를 내어 문을 열고 말을 했다.
“밤마다 문만 두드리지 말고 이제 저와 결혼해 주시면 안 되나요?”
밖은 조용했다. 아무 말이 없는 조용한 시간이 흘렀다. 낙심한 처녀는 신발을 신고 바위 위에 올라섰다.
"왜 매일 찾아오면서 아무 말이 없는 거죠? 제가 눈먼 소경이라서 싫은가요?“
처녀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향하여 울먹이며 고함을 쳤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처녀는 사라졌다. 길고 커다란 팔이 나타나 눈 깜짝할 사이에 처녀를 안아가 버렸다. 시끄러운 소리에 잠이 깬 어머니가 방문을 열었을 때는 검은 바다에 거대한 파도가 보랏빛 점을 안고 굴러가고 있었다.
그 후로 처녀의 모습은 다시 볼 수 없었고 처녀의 방문을 두드리는 이도 없었다. 처녀를 가엾이 여긴 파도가 밤마다 처녀를 찾아오더니 결국 바다왕국으로 데려가 버렸다는 전설만 전해올 뿐이다. 그 이듬해부터 처녀가 살았던 바위에는 보랏빛 꽃이 틈마다 피었다. 아무리 파도가 심한 날도 이곳 바위는 파도가 피해간다고 한다.
바닷바람과 파도도 보호하는 꽃, 바닷가에 피는 보라색 꽃이다. 바다를 바라보는 처녀의 애절한 마음이 담긴 꽃이라 하여 ‘바다해바라기’ 또는 ‘해국’이라 부른다. 해국의 꽃잎은 서른 장, 꽃말은 기다림이다.
- 감포 깍지길 1구간 전촌항 북쪽 해안길, ‘처녀를 사랑한 파도’ 지점에 전해오는 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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