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으로서의 예수/안병무
서양 사람들은 “예수가 누구냐?” 하고 “누구냐”만 물어요.
그래서 예수도 “이러이러한 인격이다”라는 답을 얻고
거기에 안주하고 말아요.
그러나 나는 그게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예수는 하나의 사건이다!
하느님도 하나의 사건이다!
나는 이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예수를 인격으로 본 것은 틀렸다, 잘못 본 것이다!
이 깨달음이 내 신학적인 전환점이었습니다.
“사건”이지 왜 “인격”이냐?
2천 년 전에 팔레스틴 갈릴래아에 살았던
예수 개인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사건이 중요하지!
이 깨달음이 뒤늦게나마 내게 온 것이지요.
“사건으로서의 예수”,
이것이 고리가 되어 나의 역사적 예수의 추구는
민중신학으로 연결된 것입니다.
그전에는 역사적 예수를 추구하면서도
그의 인격에 매료되어
개인으로서의 예수를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서구신학자들은 이른바 “말씀의 신학”이라고 해서
예수를 “말”의 사건으로 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예수의 말씀에서보다
“십자가”라는 “사건”에서 성립한 것입니다.
나는 예수를 민중의 사건, 집단적 사건으로 보고 있어요.
그 사건, 예수사건은
결코 2천 년 전에 일회적으로 완성된 것이 아니고,
지금도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역사 전반에서
거듭 일어나고 있다 이겁니다.
예수는 사건입니다.
예수사건은 역사의 흐름과 더불어
민중사건으로서 지금도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안병무, [민중신학이야기], 한국신학연구소, 25-26쪽.)
십자가사건/안병무
한마디로 복음서는
“그리스도론”의 전개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민중운동사건을 보도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와 민중은 주객 관계가 아니라
함께 사건을 일으키는 “우리”이다.
당시 갈릴리는 많은 분노한 민중들이
산 동굴에 거점을 마련하고
삶 아니면 죽음이라는 결단으로
일대 접전을 준비하는 분위기,
어쩌면 동리마다 몇 가구 또는 몇몇 청년들이 가담하여
당국의 사찰 대상이 되어 있고,
거리로 정처 없이 다니는 사람들이 심문의 대상이 되는
그런 장(場)이었을 것이다.
그런 민중이 예수와 예루살렘으로 돌진해 들어갔고
거기서 예수가 처형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은 예수 개인의 운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사건이다.
그 사건에 가담하지 않으면 그 의미를 모른다.
십자가의 사건을 핵으로 삼고 있는 그리스도교는
십자가의 정치적 성격과 그 민중사건성을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또 이른바 부활경험은
예수의 사건과 무관한 사람들에게는
인식되지 못한 사건이다.
사건으로 성서를 본다는 것은 바울에게도 해당된다.
그는 말씀의 사건이 아니라 사건의 신학을 말한다.
바울의 생애는 사건 투성이다.
왜 사람들은 이 바울에게서 일어난 사건들을
그의 생애를 이해하는 데서 제외하는가!
왜 그의 투옥의 이유를 말하지 않는가?
그의 말에는 거의 정치적인 발언이 없다고 하나,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주목하고
그의 신학의 중심을 “십자가”라고 집약한 이유를
엄숙하게 생각해야 한다.
(안병무, [민중신학이야기], 한국신학연구소, 82-84쪽.)
서양 사람들은 “예수가 누구냐?” 하고 “누구냐”만 물어요.
그래서 예수도 “이러이러한 인격이다”라는 답을 얻고
거기에 안주하고 말아요.
그러나 나는 그게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예수는 하나의 사건이다!
하느님도 하나의 사건이다!
나는 이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예수를 인격으로 본 것은 틀렸다, 잘못 본 것이다!
이 깨달음이 내 신학적인 전환점이었습니다.
“사건”이지 왜 “인격”이냐?
2천 년 전에 팔레스틴 갈릴래아에 살았던
예수 개인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사건이 중요하지!
이 깨달음이 뒤늦게나마 내게 온 것이지요.
“사건으로서의 예수”,
이것이 고리가 되어 나의 역사적 예수의 추구는
민중신학으로 연결된 것입니다.
그전에는 역사적 예수를 추구하면서도
그의 인격에 매료되어
개인으로서의 예수를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서구신학자들은 이른바 “말씀의 신학”이라고 해서
예수를 “말”의 사건으로 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예수의 말씀에서보다
“십자가”라는 “사건”에서 성립한 것입니다.
나는 예수를 민중의 사건, 집단적 사건으로 보고 있어요.
그 사건, 예수사건은
결코 2천 년 전에 일회적으로 완성된 것이 아니고,
지금도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역사 전반에서
거듭 일어나고 있다 이겁니다.
예수는 사건입니다.
예수사건은 역사의 흐름과 더불어
민중사건으로서 지금도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안병무, [민중신학이야기], 한국신학연구소, 25-26쪽.)
십자가사건/안병무
한마디로 복음서는
“그리스도론”의 전개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민중운동사건을 보도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와 민중은 주객 관계가 아니라
함께 사건을 일으키는 “우리”이다.
당시 갈릴리는 많은 분노한 민중들이
산 동굴에 거점을 마련하고
삶 아니면 죽음이라는 결단으로
일대 접전을 준비하는 분위기,
어쩌면 동리마다 몇 가구 또는 몇몇 청년들이 가담하여
당국의 사찰 대상이 되어 있고,
거리로 정처 없이 다니는 사람들이 심문의 대상이 되는
그런 장(場)이었을 것이다.
그런 민중이 예수와 예루살렘으로 돌진해 들어갔고
거기서 예수가 처형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은 예수 개인의 운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사건이다.
그 사건에 가담하지 않으면 그 의미를 모른다.
십자가의 사건을 핵으로 삼고 있는 그리스도교는
십자가의 정치적 성격과 그 민중사건성을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또 이른바 부활경험은
예수의 사건과 무관한 사람들에게는
인식되지 못한 사건이다.
사건으로 성서를 본다는 것은 바울에게도 해당된다.
그는 말씀의 사건이 아니라 사건의 신학을 말한다.
바울의 생애는 사건 투성이다.
왜 사람들은 이 바울에게서 일어난 사건들을
그의 생애를 이해하는 데서 제외하는가!
왜 그의 투옥의 이유를 말하지 않는가?
그의 말에는 거의 정치적인 발언이 없다고 하나,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주목하고
그의 신학의 중심을 “십자가”라고 집약한 이유를
엄숙하게 생각해야 한다.
(안병무, [민중신학이야기], 한국신학연구소, 82-84쪽.)
출처 : 반석의 신앙 따라잡기
글쓴이 : peterban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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