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으로 난 작은 길 / 최학
옛 사람이 홀로 걸었던 길들을 생각해 본다. 물론 어딘가에 닿아 누군가를 만나고 뭔가 이루기 위한 길이 아니다. 오로지 자연 가운데서 무연히 삼라만상의 조화와 변전을 바라보는 가운데 내 삶과 생각을 추스르는 관조와 성찰의 길이었던 까닭에 애당초 기기묘묘와 헌사로움과는 거리가 먼 길들이다.
퇴계가 걸었다는 도산서원 동편의 천연대(天淵臺) 길은 우주의 근본을 생각하며 삶의 지고가치를 찾아 나선 한 철인(哲人)을 이끈 도(道)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강이 내려다보이는 숲길을 따라가다 보면 바위 벼랑도 나타나고 탁 트인 들판을 조망할 수도 있다. '솔개는 날아서 하늘에 이르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뛴다'는 시경(詩經)의 말을 빌려 언덕의 이름을 쓴 까닭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은 산길인 것이다.
하회마을에서 강 너머로 보이는 깎아지른 절벽이 부용대이다. 그 바위벽 허리를 가로 질러 절벽의 이편과 저편을 연결하는 작은 돌길은 서애 류성룡이 형님 류운룡을 찾아뵈며 문안을 드리고 학문을 여쭙던 길이다. 발 하나 겨우 디딜 수 있는 위태로운 길에는 없는 길을 내겠다고 정으로 돌을 쪼아낸 흔적도 있다. 이는 예(禮)의 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설악산 오세암에서 백담사에 이르는 개울가 숲길은 젊은 날의 만해 한용운이 걷던 길이다. 그는 이 적막한 산길을 걸으며 자기 수련과 함께 대의를 위한 모색과 실천을 준비하였으니 이 산길은 전망의 길이라고 할 만 하다.
이 길들은 아름답긴 하나 혼자 걸을 수밖에 없다. 동행과 이웃이라곤 철따라 변하는 나뭇잎과 꽃, 물길과 먼 데 보이는 산봉우리뿐이다. 자연을 관통하면서 사유(思惟)를 확장시키는 데 이바지한 이 길들은 그 자체로 우리의 소중한 정신문화가 될 수 있다.
도시적 삶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이런 자연의 산책로를 잃어버린 지 오래 됐다. 더러 가까운 산과 강을 찾고 공원길을 걷는다 해도 목적은 대개 엇비슷한데 내 몸을 튼튼하게 해서 더 오래 살기 위해서다. 그렇게 잘 관리한 덕에 우리 모두는 옛 사람들보다 훨씬 더 오래 살면서 더 많은 것을 보고 배울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도 세상에는 지혜로운 이는커녕 어른스러운 이조차 드물다는 말들이 횡행하는 까닭이 무엇일까.
철리(哲理)와 도덕이 그 힘을 잃고 자본만이 권세가 된 시대에는 사유와 성찰쯤은 사치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는 비생산적일 뿐만 아니라 현재의 권력에 대한 잠재적 위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차이는 있어도 대학의 사정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 학생들은 어떻게 하면 취업을 잘하고 돈을 잘 벌 수 있을까가 최대의 관심사이며 교수는 교수대로 여기저기 눈치나 볼 수밖에 없는 처지다. 신입생 유치를 위해 얼마나 뛰었느냐, 몇 명이나 졸업생을 취직시켰느냐, 학생평가는 몇 점이고 논문은 몇 편 발표했느냐 등이 교수 능력의 잣대가 된 세상이기 때문이다. 이들 능력은 늘 점수로 계량화된다. 대학과 기업의 차별성이 없어진 자리에서는 학생도 교수도 경쟁력 제고의 수단 이상이 되질 않는다.
물론 이러한 계량적 공리주의가 거둔 결과를 과소평가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는 언젠가 한계를 맞이할 수밖에 없으며 그 전에 이미 차체의 무리로 인해 전혀 다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먼 장래를 바라보는 대학은 지성의 부활과 지식의 건강한 생산을 위한 사유 시스템을 미리 갖추어 나가야 할 것이다. 그것은 곧 대학 자신이 확보한 인재들이 자신의 산길을 걸으며 궁리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기회와 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 이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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