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색/인디언을 찾아서

인디언 학살과 착취 2

비오동 2009. 10. 5. 16:52

인디언 학살과 착취 2

 

이정덕(전북대 고고문화인류학과) 

   [2009년6월호]    조회 : 457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코르테즈가 아즈텍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도 인디언들의 분열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백인들이 가져온 전염병이 먼저 퍼져 수많은 인구가 죽었고 이에 아즈텍 사회체계 자체가 해체되어 전의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아즈텍인은 코르테즈군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무기의 차이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잉카가 168명에게 정복된 것에는 내분도 있었지만 아타왈파 황제가 피사로군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8만명의 잉카군이 있어 아타왈파황제는 168명에 불과한 피사로군을 우습게 보았지만 스페인 군인은 한 명도 죽지 않고 인디언을 7천명이나 죽이면서 승리하였다. 이후 잉카의 여러 저항이 있었지만 쉽게 진압되었다. 제레드 다이어몬드의 <총, 균, 쇠>에 따르면 세상 지식에 대한 차이(인디언은 처음 보는 백인, 대포소리, 기마병 등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무기(말과 검)의 차이 때문이었다. 무딘 청동기, 돌도끼, 곤봉으로 싸우는 잉카군들에게 말을 타고 철검을 휘두르는 피사로군과 싸우는 것은 현대전에서 보병이 기관총과 탱크로 무장한 부대와 싸우는 것과 같다. 이후에도 스페인 기마병 수십명이 수천명의 인디언들을 흔하게 무찔렀다. 총이 등장한 이후 불균형은 더욱 심해졌다.

   이러한 차이로 세계사 최대의 학살극이 미주대륙에서 자행되었다. 결국 5000만명이 넘는 인디언(1억명이 넘는다고 추산하기도 한다)들이 백인들에게 무력하게 학살되거나 또는 기아와 질병에 죽었다. 1800년대 이후 말과 총을 갖추게 인디언 집단만 겨우 제대로 백인에 저항할 수 있었다.



 

    미국에서의 인디언 학살

    1630년부터 매년 약 1000명의 영국인이 미국 보스톤 부근 플리머스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농지를 확보하기 위해 주변의 인디언들을 쫒아내고 죽였다. 이어지는 영국이나 미국의 정책은 죽은 인디언이 더 좋다는 것이다. 즉, 인디언들을 죽이는 것이 더 낫다는 뜻이다. 기본적으로 이들을 인디언들을 청소하고 그 땅에 백인들이 정착지를 개척하고 농사를 짓는 것이다. 서구의 인구 과잉으로 많은 서구인들이 대규모의 농지를 무료로 확보할 수 있는 북미대륙으로 건너오게 되자 인디언 청소 작전은 더욱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미국독립 이후에도 계속 인디언들을 무력으로 공격하여 쫓아냈다. 초대 대통령이 될 워싱톤은 1783년 “우리 정착지가 점점 넓어지면 앞으로는 분명 야만인, 즉 늑대같은 인디언들의 후퇴가 불가피해질 것”이라고 기록했다. 미국 최고의 법관으로 추앙받는 초대 대법원장(1801-1835)인 존 마셜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땅에 살았던 인디언부족들은 전쟁을 직업으로 삼고 숲에서 나오는 산물로 생계를 이어온 야만인이었다...... 정복자와 피정복자의 관계를 일반적으로 규정하는 법, 그리고 규정해야만 하는 법은 그러한 상황의 사람들에게는 적용될 수 없다. 유럽인에 의한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은 그 대륙을 매입하든 정복하든, 인디언의 점유권을 소멸시킬 수 있는 독점권을 주었다.”
    3대 대통령 제퍼슨은 “[인디언들은] 앞으로 전쟁을 통해 숫자가 더욱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했다. 5대 대통령 먼로는 “인디언들이 서부로 이주하는 것이 곧 수혜를 입는 것”이라고 했다. 특히 잭슨대통령은 1830년부터 면화재배지를 확대하기 위해 남부의 여러 원주민들을 1300km가 넘는 오클라호마 등의 중부 황무지로 쫓아냈다. 겨울에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부족한 상태로 이동하느라 가면서 3분의 1이 죽었다(예를 들어 촉토인디언은 13000명 중 4000명 정도가 죽었고, 체로키 인디언은 4000명중 2800 정도 죽었다). 이 때 인디언을 쫒아내던 필립 셰리던 장군은 “내가 지금껏 보아온 인디언 중 선량한 자라고는 죽은 인디언뿐이었다.”라고 말했다. <미국의 민주주의>를 저술하여 미국의 민주주의를 세계 최고의 제도라고 칭찬한 프랑스인 토크빌이 마침 테네시에서 이들의 행렬을 보았다. 그렇지만 그는 이를 미국의 인권탄압이나 미국 민주주의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20세기에 들어 저명한 인류학자 알프레드 크로버는 미국동부에서의 인디언 저항을 미친 짓이라며 “[식민지] 규범에서 벗어나려는 집단은 가차없이 조기에 멸종되고 만다.”고 했다.

                                          
                                              * 플로리다, 조지아, 미시시피에서 오클라호마로 쫓겨 갔던 인디언들의 “눈물의길”

   1848년 중부 캘리포니아에서 황금이 발견되자 백인들이 몰려오며 인디언 땅을 마음대로 침략하고 인디언들을 죽였다. 백인농부들로 토지를 빼앗기 위해 인디언들을 죽이고 쫓아냈다. 이런 방식으로 중부 캘리포니아에 살던 유키 인디언의 수는 1859년 5000명에서 1864년 300명으로 줄었다. 백인들이 어느 날 잠자는 인디언을 공격해 하루에 300명을 죽이기도 했다. 물론 이러한 작전은 인디언을 절멸시키겠다는 것보다는 백인의 토지를 확보하겠다는 의미가 강하다. 따라서 토지를 내놓고 황무지로 피해가는 인디언들이나 스스로 백인에게 복종하는 인디언들은 죽이지는 않았다. 때로는 속이거나 헐값으로 구매하거나 일방적인 조약을 강요하며 땅을 빼앗았다. 이런 저런 방식으로 미국은 결국 951만㎢를 차지하게 되었다.
   무기나 지속적인 전쟁체계를 갖추지 못한 인디언들은 게릴라식으로 각지에서 백인들을 공격하였지만 백인들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인디언들이 백인을 공격할 때마다 그보다 몇 배 강력한 공격을 통해 인디언들 대량 학살하고 또는 포로로 잡아 노예로 팔았다. 총을 가진 백인들을 인디언들이 막아낼 수 없었다. 또한 백인들이 인디언들을 죽여도 서부 지역에서는 20세기초까지 별 문제가 없었다.
   인디안들도 물론 백인들을 잔인하게 공격하고 학살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는 백인들이 인디안을 학살하는 경우와 다르게 해석해야 한다. 인디언들은 기본적으로 자신들의 토지를 빼앗겼고 지속적으로 쫓겨났다. 그리고 백인들에 의해 노예가 되거나 또는 사망을 당할 처지에 있었다. 인디언들이 백인들을 노예나 농노로 삼기 위해 잡거나 또는 토지를 빼앗기 위해 공격한 것이 아니다. 자기 땅을 지키려 침략자를 공격한 것이다. 방어의 의미가 크다. 하지만 그 당시 백인사회에서는 열등종인 인디언들이 잔인하게 백인을 공격하여 죽이기 때문에 인디언들이 말을 듣지 않으면 마음대로 죽여도 된다는 분위기였다.

 


   병원균에 의한 대량 사망

   인디언들의 대부분은 직접적인 살인보다는 천연두, 발진티푸스, 홍역 등에 의해 죽었다. 미주대륙에 없던 병원균들을 서구인들이 옮김으로서 인디언들 사이에 전염병이 확산되어 대규모의 인구가 죽었다. 인디언 사망자들의 75%에서 90%가 전염병에 의해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적은 단위의 인디언 부족들은 거의 멸절되었다.
   서구인들이 인디언을 죽이기 위해 직접 세균을 퍼트리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1763년 펜실베니아에서 영국군 사령관인 애머스트 경은 델레웨어 인디언과 싸우고 있는 부케대령에게 편지를 써서 “천연두균을 묻혀 모포를 배포하거나 다른 모든 수단을 써서 이 저주받을 인종을 절멸시키는 것이 좋겠다.”라고 지시했다. 그 이후 실제 천연두가 퍼졌다. 1837년에도 다코타의 미군 장교들이 천연두균이 묻은 모포를 인디언에게 일부러 주었고 그 후 천연두가 퍼져 10만명 이상 죽었다고 앞에 언급한 처칠 교수는 주장했다. 대체로 가해자 측에서는 이러한 사건을 축소하거나 보고하지 않는 경향이 있어 자료가 별로 없지만 그 당시 서구인에게 어느 정도 생물학적 지식이 있고 그렇게 하라는 편지가 있기 때문에 균을 일부러 확산시켰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 고문당하고 봉사하는 인디언(16세기)

   대량학살에도 불구하고 인디언들이 대다수가 전염병으로 죽었기 때문에 백인들이 별로 책임이 없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는 근본적인 문제를 놓치고 있다. 1592년부터 시작된 임진왜란으로 1000만명 정도였던 조선인구에서 200만명 정도 죽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왜군이 직접 죽인 수는 25만명 정도이지만 죽은 자의 대부분은 기아, 전염병, 건강문제로 죽었다. 기존의 식량생산과 분배체계를 파괴함으로서 조선인이 쉽게 기아나 질병에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왜군의 침략이 없었다면 나타나지 않았을 사망이다. 질병이나 기아에 의한 인구감소도 결국 백인들이 인디언의 사회체계, 식량생산, 배분체계를 파괴하고 새로운 병균을 도입하여 나타났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책임은 백인들에게 있다. 보통 전쟁을 하면 직접 살인보다 10배 가까운 사람이 질병과 기아 등으로 죽는 것을 보인다. 결국 5000만명이 넘는 인디언들이 서구 침략으로 죽었고 직접 살해당한 사람의 수가 수백만명, 질병이나 기아로 죽은 자가 수천만명으로 추측된다.


    약탈국가 스페인과 해적국가 영국

   중남미에서는 스페인인들이 카리브해, 아즈텍제국, 잉카제국을 쉽게 무너뜨리자 스페인 왕이 이를 군인/관료 등에 나눠주는 엔코미엔다라는 정책을 썼다. 즉 대규모의 땅과 인디언을 나눠주고 이를 마음대로 통치하고 사용하게 하였다. 인디언들은 거의 노예나 마찬가지였다. 초기에는 대개 광산에서 금이나 은을 채굴하게 하고, 황금/현물/세금/노동력을 바치도록 했다. 이러한 약탈물을 배로 스페인으로 옮겨가면서 스페인은 세계 최강대국이 되었다. 토지를 나눠받은 스페인 사람들은 두세대 후에 왕에게 반납하게 되어 있지만 실제는 거의 사유화되었다. 1574년 약 4000개의 엔코미엔다가 있었고 약 650만명의 인디언이 관할되었다. 점차 농사를 짓는 농장체계가 확산되면서 엔코미엔다는 하시엔다(대농장)체계로 변하였고 플랜테이션이 확산되면서 설탕, 인디고, 커피, 카카오 등 서구로의 수출을 목표로 한 농업체계가 성립되었다. 완전히 유럽을 위한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이 당시 영국은 해적을 지원하여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배들을 약탈하였다. 스페인의 황금과 약탈물들을 빼앗는 해적국가였다. 이를 징벌하고자 스페인 무적함대가 1588년 영국을 침략하자 영국해군은 사거리가 긴 대포로 무적함대를 격퇴시켰고 더욱 열심히 식민지 배들을 약탈하였다. 영국은 해적질로부터 시작하여 스페인을 넘어설 수 있었다. 이 재화로 엘리자베스1세는 외국에 대한 빚을 갚고 식민지개척회사를 만들어 이집트, 인도 등에 대한 강력한 식민교역을 시작하여 큰 돈을 벌면서 군사력과 식민개척을 강화하고 식민지 약탈과 교역을 확대하면서 강자가 되었다. 1652년부터 1674년까지 네덜란드와의 전쟁에 이기면서 바다의 최강자가 되었다. 영국은 식민지 독점을 철저히 지키면서 영국만의 이익을 확대하는 데 골몰하였다. 이 과정의 전쟁과 정복은 총체적 독점 약탈체제를 위한 무력행사였다.
    북미의 발달 경로는 중남미와 조금 다르다. 처음에는 인디언들을 주로 모피 수집책으로 활용하였고 보스톤, 뉴욕, 버지니아는 일찍부터 영국해적의 본거지 역할을 했다. 점차 유럽인이 많아지면서 남부 미국은 면화, 담배, 인디고를 백인채무노동, 흑인노예, 소작을 통해 생산하여 수출하였지만, 북동부는 날씨와 인구문제로 대농장이 정착하지 못하고 직접 백인이 농사를 지으면서 밀을 수출하거나 북동부 항구를 중심으로 어업, 교역, 조선, 양조업(럼), 소규모 제조업 등이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북동부 미국은 이를 기반으로 19세기 후반 산업혁명을 받아들여 급속하게 성장할 수 있었다.

                                            
                                                 * 스페인과 미주대륙 사이의 물동량(1500~1650년, 해마다 수만톤 이동)

    그렇다면 미주대륙에서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 등이 얼마나 약탈을 했을까? 물론 오늘날처럼 정확한 자료는 없지만 학자들의 추론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워드 배럿(프랑크 리오리엔트 249쪽)에 따르면 1493년부터 1800년까지 세계 은의 85%, 금의 70%는 중남미에서 왔다고 결론지었다. 이 기간 중남미의 은생산량은 13만3천톤(현 가치로 대략 400억 달러), 금 생산량은 약 3000톤(현 가치로 약 8백억달러)정도였을 것이다. 서구인이 노예를 미주 대륙에 판매하고, 노예/농노/강제 노동을 통해 저렴한 농축산물(설탕, 커피, 담배, 인디고, 소 등)/광물(금, 은, 구리, 수은 등)을 확보하고, 서구상품의 독점 시장으로 활용하여 1492년에서 1900년 사이에 미주 대륙을 통해, 토지강탈 이익을 제외하더라도, 현재 가치로 1조달러 이상의 이익을 창출했을 것이다. 더구나 서구의 넘치는 인구가 미주대륙으로 이주했다. 세계로 이주해나가지 못하고 서구의 인구밀도가 계속 높아졌다면 서구는 지속적 반란과 혼란에 빠져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서구가 세계를 정복해 나가면서, 1500년에서 1900년 사이에 인디언은 절멸 수준으로 축소되고, 아프리카나 아시아지역의 인구가 두 배밖에 늘지 않았는데, 유럽인(식민지 유럽인 포함)은 4.4배로 증가할 수 있었다.
    스페인과 영국은 인디언(영국은 인도와 아프리카 등 포함)에 대한 학살, 갈취, 강제노동을 통해 국부를 키우고 군사력을 강화하며, 한 때 세계최고의 강대국이 되었다. 이러한 과정이 없었다면 서구가 과연 산업혁명을 성공시키고 세계에서 최고로 발달된 지역이 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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