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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 학살과 착취 1

비오동 2009. 10. 5. 16:51

인디언 학살과 착취 1

 

이정덕 (전북대 고고문화인류학과 교수) 

   [2009년5월호]    조회 : 408

   
   산업혁명이 진행되면서 서구는 중국이나 인도를 넘어설 수 있었다. 앞의 글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전세계 제조업 생산량과 관련하여 1750년 중국 33%, 인도와 유럽은 각각 23%를 생산하였고, 1800년에는 중국 33%, 유럽 28%, 인도 19%, 산업혁명이 궤도에 오르면서 1830년에는 유럽 34%, 중국 29%, 인도 18%, 1900년에는 유럽 60%, 미국 20%, 중국 7%, 인도 2%로 변했다(마르크스 <다시 쓰는 근대세계사 이야기> 5장). 서구는 1820년부터 중국을 추월하더니 1900년에는 세계를 절대적으로 지배했다. 1800년대 초반의 산업혁명이 서구가 세계를 주도하게 된 절대적인 계기이다.
   만약 산업혁명이 없었다면 서구의 우위가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고 미주대륙은 몰라도 아시아와 아프리카 대륙은 지배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더구나 서구우월주의적 역사, 학문, 사상도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몽고도 세계를 지배할 당시 세계사를 자기들 중심으로 기술했지만 결국 이러한 시각도 사라지고 말았다. 중국도 가장 오랜 동안 세계 최강대국이었으며 중국 중심으로 모든 것을 설명했지만 결국 무너졌다. 중동이나 이집트도 기원전 1000년 이상 세계를 선도했지만 그들 중심의 설명은 모두 사라졌다. 지금의 서구우월주의적 역사, 사상, 학문도 서구의 주도적인 위치가 쇠퇴할 때(나는 21세기 중반에 나타날 것으로 생각한다), 서구우월주의적으로 기술된 현재의 역사, 사상, 학문도 모두 다시 쓰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산업혁명이 어떻게 서구에 나타났고 앞으로 어떻게 서구중심 세계체제가 몰락할 것인가? 지금부터는 산업혁명이 가능하게 한 요인들을 몇 번에 걸쳐 설명하고자 한다. 앞에서 산업혁명에 이르게 된 제철기술이나 유사증기기관도 중국이 앞서 있었고 이를 서구가 배워서 개선했다고 말했다. 물론 서구가 새로운 기술도 많이 발전시켰다. 서구가 그 역할을 과장하여 기술하고 있는 서구의 과학혁명, 정치체제, 대항해, 계몽주의 등이 산업혁명에 직접적으로 기여하지 않았다. 산업혁명에 가장 중요한 것은 제철기술과 증기기관이었고 이를 계속 개선한 데 있다. 또한 이를 위한 원시적 자본축적과정이 있었고, 증가된 생산품의 소비처(서구/식민지)가 있었다는 점이다.
    미주대륙을 점령하고 인디언(콜롬부스는 캐리비안 섬들을 인도의 섬으로 취급하면서 미주 대륙 원주민들을 황당하게도 인디언-인도사람-으로 불렀고 그게 굳어져 이들을 계속 인디언으로 부르고 있다. 다른 용어가 없기 때문에 미주대륙 원주민을 이 글에서도 인디언이라고 부르겠다.)을 학살하면서 착취해온 금과 은, 아프리카 노예무역, 식민지착취(강제약탈, 값싼원료확보, 시장확대), 자국 산업의 보호정책이 커다란 기여를 했다. 이 과정에서 서구 백인들은 문명인이고 나머지는 야만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서구백인들이 나머지 인종을 문명화시킬 사명을 부여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실제로는 세계적으로 야만인을 학살하거나 철저히 복종시켜 착취하는 체계를 1500년대 이후 점차 확대해왔다. 그 중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이 인디언들을 학살하고 갈취하고 농노화하는 것이었다.
    이번 글에는 윤상환의 <인디안투쟁사>, Thornton의 , 노암 촘스키의 <507년, 정복은 계속된다>, 인터넷 자료 등을 활용하였다.



   미주대륙의 발견과 약탈

   콜럼버스에 앞서서 로마시대에 미주대륙에 도착했다거나 또는 로마시대 인디언이 표류해서 서구에 도착했다는 주장도 있다. 바이킹이 7~9세기에 캐나다 지역에 도착했으며 심지어 명 초기 정화제독이 남극과 미주대륙을 방문했다는 주장도 있다. 미주대륙이 세계사적 의미를 지닌 것은 콜롬버스의 방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대략 왕복 1만5천km를 항해했다. 태평양 횡단거리는 대서양의 대략 두 배 정도다). 서구인들은 제노바 출신 콜롬부스는 스페인 왕의 후원을 받아 세척의 배로 대서양을 건너 미주대륙을 발견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이미 수천만명이 살고 있는 곳을 발견했다고 하는 것은 완전히 서구중심적 기술이다). 하여튼 콜럼버스는 그 당시 수지맞는 동방무역(각종 향료 그리고 황금)을 제네바와 베네치아가 독점하고 이슬람에 의해 가로막혀 있어 대서양을 건너는 중국이나 인도와의 직접적인 교역로를 열려고 했다.
   1405년에서 1433년까지 명나라 정화제독은 7번에 걸쳐 남경에서 남양 또는 인도양으로 항해하였다. 콜럼버스의 배보다 10배 이상 큰 배(길이 122m 선폭 52m 돛대 9개, 약 2700톤)를 가지고 총 317척 27800명이 탑승하여 케냐에 까지 이르렀다. 일부는 남아프리카까지 갔다고 하고 한 연구자는 호주, 남극대륙, 미주대륙까지 들렀다고 주장한다. 케냐까지 간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이후 수도도 남경에서 북경으로 바뀌고 북방의 몽고방어에 전념하고 해안에 왜구들이 늘어나자 폐쇄해 더 이상 해외개척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에 비해 콜럼버스의 출발은 초라했지만 그 결과는 세계사를 뒤흔드는 것이었다. 콜럼버스는 세척의 조그만 배(가장 큰 배: 길이 29m, 폭 8.5m, 돛대 3개)와 90명이라는 빈약한 인원으로 출발하여 아메리카 대륙을 찾았다.
 
                                            
                                        명나라 초기 정화의 원정루트(1405~1433, 대략 2만 km 이상 항해했다)

                                            
                                            콜럼버스의 첫 번째 항해(1492~3년, 대략 1만5처km를 항해했다)


   우리는 이런 사실만 배웠지 콜롬버스가 인디언에게 저지른 만행에 대해서는 별로 배우지 않았다. 그는 아주 잔인하고 황금에 눈이 어두운 사람이었다. 1492년 인디언들은 그를 환대했다. 하지만 그는 인디언을 납치해 스페인으로 끌고 왔다. 이때 그는 스페인 이사벨라 여왕에게 향료와 황금이 많다고 거짓말을 했다. 1200명을 이끌고 출항한 1494년의 두 번째 항해에서 도미니카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인디언들을 수백명씩 잡아다 노예로 팔았다. 그리고 섬주민들에게는 강제로 황금을 채굴해오라고 하고 책임량을 가져오지 않으면 손목을 잘랐다. 반항하면 코를 자르고 귀를 잘랐으며 개가 달라 들어 물어뜯었다. 기록에 따르면 약탈, 강간, 고문, 살인이 흔하게 이루어졌다. 창으로 총과 새로운 전염병을 이길 수 없었다.

                                                
                                            인디언의 손목을 자르는 스페인군인들(드 브리, 1504년 목판화)

   스페인이 점차 카리브해 섬들을 차지하자 1519년 코르테스는 3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아즈텍 수도인 테노치티틀란(현 멕시코시티)를 침략했다가 패퇴당했다. 그런데 갑자기 콜레라, 천연두, 폐렴 등이 돌았다. 수도에서 24만명 정도 죽었다고 한다. 1521년 코르테스가 인디언 동맹군과 함께 다시 침략하자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간 아즈텍은 항복했다. 피사로는 이 소문을 듣고 또 다른 황금의 나라를 찾던 중 잉카를 찾아냈다. 정보를 파악한 다음 1532년 200명의 군인을 이끌고 진격했는데 2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있던 잉카 아타왈파황제는 피사로군의 수가 너무 적어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보고 잔치에 초대했다가 오히려 황제가 사로잡히고 말았다. 결국 피사로군은 그 당시 유럽 어느 나라도 보지 못한 양인 금7톤(현 가치로 약 2억 달러), 은13톤을 약탈하고 잉카제국도 결국 멸망시켰다. 하지만 피사로도 부하인 드 알마그로에 1541년 리마에서 살해당했다.
   피사로의 부관이었던 소토는 1539년 600명의 병사를 이끌고 플로리다에 상륙하여 또 하나의 잉카를 찾기 위해 조지아, 캐롤라이나, 앨러바마, 미시시피, 아칸소까지 인디언들을 죽이고 휩쓸고 다녔지만 황금의 나라를 찾지 못하고 결국 병에 걸려 죽었다. 코로나도는 1540년 멕시코를 출발하여 뉴멕시코, 아리조나로 12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전진하였다. 인디언을 대량으로 학살하다가 저항이 거세지자 멕시코로 회군하였다. 이후 다양한 사람들이 미주 대륙 전역을 황금을 찾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찾아 다녔다. 



   잔인한 스페인사람들

   콜럼버스는 저항하는 인디언을 잔인하게 다루며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바치도록 했다. 아무리 찾아도 황금이 나오지 않자 인디언들에게 3달에 일정한 양의 금을 찾아서 바치도록 했다. 바치는 사람에게는 목에 구리줄을 차도록 하여 이를 매지 않은 사람에게 가혹한 형벌을 가했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중남미 전역이 스페인의 잔인한 지배에 노출되었다. 군사들에게 대규모로 땅을 나눠주고 그 안의 인디언을 마음대로 부리게 하였다. 스페인인들은 원주민을 노예로 삼아 금을 채취하거나 농노로 삼아 일을 시켰고 원주민의 재산을 약탈하였다. 말을 듣지 않으면 죽였다. 바르톨로메 데 라스 까사스 신부는 1513년 스페인군의 쿠바점령에 종군하며 “이제껏 보지 못한 가장 잔인한 학살이었다”라고 기록했다. 또한 그는 <서인도제도의 역사>라는 책에 다음과 같이 썼다. “스페인인들은 사람을 두동강 낼 수 있느냐? 목을 자를 수 있느냐? 창자를 끄집어 낼 수 있느냐? 내기를 걸기도 했다. 엄마의 젖을 먹고 있는 애기를 발로 차고 찢어발기고 머리를 바위에 쳐박았다. 부녀자를 능욕하고 죽이기도 했다.... 심지어 장작불속에 던져 넣어서 살아 있는 인디언을 태워 죽였다. 나는 모든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나의 두 눈으로 그 증거를 확인했다.” 

                   
                인디언을 학살하는 스페인 군인들(드 브리, 1504년 목판화)

   스페인사람들에게 인디언은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사람같은 동물이었을 뿐이다. 초기에 건너와 중남미를 정복한 스페인사람들은 이러한 학살과 약탈을 일삼으며 대영주, 소영주, 부호가 되었다.
   스페인사람들보다 거의 100년이 늦었지만 황금의 도시인 북경(마르코 폴로가 <동방견문록>에서 황금도시로 묘사한)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하며 영국사람 허드슨은 1609년 맨하탄 옆의 허드슨 강을 따라 올라갔다. 그 당시 북서쪽으로 가면 태평양이 나오는 것으로 생각했었다(인디언들이 아마 오대호를 커다란 바다라고 백인들에게 알려준 것으로 추정된다). 네덜란드인은 뉴욕, 프랑스인들은 루이지애나나 퀘백 등 황금이 없는 곳에 도착하자 인디안들과 모피교역을 했다(그 당시 유럽 상층은 모피를 입고 있었고 모피는 고귀한 신분의 상징이었다). 영국에서는 인구가 늘어나자 사람들을 미주대륙으로 보내 정착토록 하였다(1607년 영국인 최초의 정착지인 버지니아 제임스타운). 또는 박해받는 청교도들이 스스로 대서양을 건너 매세추세츠 플리머스에 정착하였다(1620년). 이들은 허가도 받지 않고 인디언땅에 거주하기 시작한 불법체류자들이다. 인디언들의 저항이 있었지만 이들과 계속 건너온 백인들은 결국 무력과 질병으로 대다수의 인디언을 학살하고 그 땅을 차지하는 데 성공하였다. 또한 뉴욕이나 버지니아는 영국해적들의 본거지로 대서양 스페인 배들을 약탈하여 분배하는 곳이기도 했다.


   인디언 대량 학살

   미주대륙에 인디언이 몇 명이나 살았는지 불확실하다. 자료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최소 840만명에서 최대 1억1천만명정도에 이를 정도로 추정이 다양하다. 인류학자 크로버가 추정한 840만명은 미주대륙에 제국이 둘이나 존재하고 캐나다에서 아르헨티나 전역에 이르기까지 인디언이 살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턱없이 부족한 숫자로 보인다. 하여튼 중간치로 추정한 디느밴에 따르면 1500년경에 아즈텍 제국 지역에 2140만명(그 당시 조선의 인구추정치는 700만명 정도), 잉카제국에는 1150만명, 북미 440만, 중미 560만, 캐리브해 580만, 남미 저지대 850만명으로 총 5730만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 숫자도 실제보다 축소되어 추정된 것으로 생각된다. 예를 들어 현재의 미국과 캐나다(남한의 2000배나 되는 넓은 땅이다)에 살던 인디언을 1500만명 정도 추정하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이다.
   콜럼부스가 처음 점령하여 총독을 했던 히스패니올라섬(현 도미니카/하이티)에서는 그가 식민지를 건설한 지(1494년) 2년 내에 섬주민 25만명의 반이 죽었고 1517년 14,000명으로 줄었다. 캐리브해의 섬들에서 인디언들이 거의 절멸되었다. 인디언들이 급속하게 죽자 1501년부터 흑인노예를 데려오기 시작했다. 1500년경 2500만명이었던 아즈텍 인디언 인구는 1600년에 100만명 정도로 감소되었고 1530년경 1200만명이었던 잉카 인구도 100년후 60만 정도로 감소되었다. 스페인사람들은 중남미에서 인디언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여 거부하면 고문을 하거나 죽여도 된다고 생각하였다. 거부한 사람들은 이교도이고 악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스페인 내에서도 그 당시 이슬람교도(1492년 스페인 내의 이슬람왕국을 완전히 정복했고 유대교도의 추방이 절정에 이르렀다)나 유대인을 그러한 방식으로 죽이거나 추방했다. 직접 죽인 사람보다 10배 이상의 질병과 기아 등으로 죽었다.
   1500년 1500만명 정도로 추측되던 북미 인디언은 1900년에는 23만7천명(인구 센서스에 나타난 기록)으로 축소되어 북미인디언들도 거의 절멸 상태에까지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북미에서 영국이나 미국의 인디언 정책은 거의 절멸정책에 가까운 것이었다. 저항하는 자는 학살하거나 실제 수많은 부족들이 절멸당했다. 나치가 유대인을 학살했다고 하지만 서구인의 인디언 학살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미주대륙에서는 수많은 종족(족 또는 부족)이 멸종당했다. 전체적으로 5000만명 이상의 인디언들이 백인들에 의한 학살, 학대, 기아, 질병으로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 이보다 더 많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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