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기술
위빠사나 명상
모든 이들은 평화와 조화를 추구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우리 삶에서 결핍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우리 모두는 짜증과 불안, 부조화와 고통을 경험하며, 이것을 자신에게만 국한시키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도 퍼트립니다. 그런 우리와 가까이하는 사람은 모두가 짜증이 나고 불안하게 됩니다. 분명히 이것은 적절한 삶의 방식이 아니죠.
사람은 평화롭게 살아가야 하며 다른 모든 이와도 그래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의 주변을 평화롭고 조화롭게 하여 다른 이들도 평화롭고 조화롭게 살아가게 할 수 있을까요?
짜증이 나게 되면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그렇게 된 근본 이유, 즉 고통의 원인을 알아야 합니다. 그 문제를 따져보면, 머리 속에 어떤 부정적이거나 불순한 것을 생각하기 시작할 때마다 동요하게 된다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부정적인 생각이나 정신적인 불순함 내지는 불결함은 평화 그리고 조화와 공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 부정적이 되기 시작할까요? 누군가 내가 좋아하지 않는 식으로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될 때, 내가 좋아하지 않는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아주 불쾌해집니다. 원하지 않는 무언가가 일어나면 긴장하기 시작하죠.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고 방해물이 생기게 되면 또 다시 긴장하기 시작합니다. 속에 응어리가 맺히는 것이죠. 그리고 살아가는 내내, 원하지 않는 일이 계속 발생하고, 원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거나 해서 응어리가 맺히는 과정 속에서 그 여파가 심신을 모두 극도로 긴장시키고 부정적인 것으로 가득 채워 마침내 삶은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한 가지 방법은 내 인생에서 원치 않는 일은 하나도 생기지 않게 하고, 모든 것이 내가 원하는 대로만 계속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런 힘을 기르거나 그런 힘을 가진 다른 누가 내가 부탁할 때마다 나를 도와주어야만 합니다. 그러면 원하지 않는 일은 생기지 않고, 모두가 내가 원하는 대로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불가능하죠. 바라는 것이 항상 완벽히 이루어지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바라지 않는 어떤 일도 발생하지 않고, 모든 것이 바라는 대로만 이루어지는 인생은 없습니다. 우리의 의도나 희망과는 반대로 계속 일들은 발생하죠. 그래서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이런 것들과 부딪혔을 때 마구잡이로 행동하지 않는 방법은, 긴장하지 않는 방법은, 평화와 조화를 유지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다른 나라처럼 인도에서도 과거에 현자들이 인간이 고통받는 문제를 연구해서 해결책을 찾았습니다. 원하지 않는 어떤 일이 발생하고 그것에 대해 분노, 두려움 혹은 어떤 부정적인 것으로 자신이 반응하려 할 때 가능하면 빨리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립니다. 예를 들면, 일어서서 물을 한 잔 마시면 분노가 커지지 않고 사라집니다. 아니면 하나, 둘, 셋 하고 숫자를 세어봅니다. 이 해결책은 유용하고 실제 효과가 있습니다. 이렇게 연습하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하지만 이 방법은 의식적인 수준에서만 효과가 있습니다. 실제로 주의를 딴 데로 돌리면 부정적인 생각을 무의식 속으로 깊숙이 밀어넣게 되는데 그러면 이 수준에서도 마찬가지로 불순한 의식이 계속 생기고 커집니다. 겉으로는 평화롭고 조화롭지만, 생각 저 깊은 곳에는 여차하면 폭발할 부정적인 마음이 점자는 휴화산처럼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내면 진리의 탐구자들은 더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마음과 물질의 실체를 체험함으로써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의를 딴 데로 돌리는 것은 문제로 부터 도피하는 것일 뿐임을, 도피는 해결책이 아닙니다. 문제와 마주쳐야 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을 바라보고 직면하십시오. 어떠한 정신적인 불순함도 그것을 바라봄에 따라 힘을 잃기 시작해서 천천히 시들고 뿌리가 뽑힙니다.
좋은 방법은 억누르거나 방치해두는 양 극단을 피하는 것입니다. 무의식에 부정적인 것을 남긴다면 그것은 근절되지 않을 것이며, 그것을 신체 행위나 말로 나타나게끔 내버려 두는 것은 더 많은 문제를 만들 뿐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면, 그 불순함은 사라지고 그 부정적인 것은 근절되게 됩니다. 불순함에서 해방되는 것이죠.
말은 근사하지만 정말 실천 가능할까요? 보통 사람이 부정적인 사고와 직면하는 것이 쉬운일일까요? 화가 치밀어 오를 때 그것은 너무나도 빨리 엄습해와서 우리는 알아차리지도 못합니다. 분노에 차면 우리는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해로운 언행을 하게 됩니다. 나중에 분노가 사라졌을 때 울며 후회하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혹은 신에게 용서를 구하지요. 하지만 다음에 비슷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또 같은 식으로 행동합니다. 부정적인 사고가 시작될 때 그 시작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 어려운 점입니다. 부정적인 사고는는 무의식 차원의 깊은 곳에서 시작되기에 그것이 의식 차원에 다다를 즈음에는 너무나도 힘이 강해져서 나를 압도하기 때문에 그것을 관조할 수 없게 됩니다. 또한 눈을 감고 분노를 관찰하려 해도 내가 화를 내게 된 사람이나 어떤 일 같은 분노의 대상이 떠오르면 분노 그 자체를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감정을 일으킨 외부적인 자극 요소에 매달립니다. 이것은 분노를 증폭시킬 뿐이지 해결책이 아닙니다. 이렇듯 분노를 일으킨 외적 대상으로부터 벗어나 어떤 추상적인 부정, 추상적인 감정, 그 자체를 관찰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하지만 궁극적 진리에 이른 분이 진짜 해결책을 찾았지요. 그분은 마음 속에 어떤 불순한 감정이일어날 때마다 신체적으로 두 가지 현상이 시작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는 호흡이 불규칙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관찰하기 쉽죠. 좀더 미묘한 차원에서는 모종의 자극, 일종의 생화학적 반응이 몸 속에서 시작됩니다. 모든 부정적 감정은 신체의 한 부분이나 다른 부분에 내부적인 자극을 발생시킵니다. 이것이 실제적인 해결책입니다. 보통 사람은 추상적인 불순한 생각, 즉 추상적인 두려움, 분노, 격정 같은 것을 관찰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올바른 훈련과 연습을 하면 정신적인 불순함에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호흡과 신체적 감각은 관찰하기가 아주 쉽습니다.
이 정신적, 육체적 현상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한 면에서는 생각이나 감정이 마음 속에서 일어나고, 다른 한 면에서는 몸 속에서 호흡과 감각이 일어납니다. 흐트러진 생각이나 감정, 즉 어떤 정신적인 불순함은 그 순간의 호흡과 감각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호흡이나 느낌을 관찰함으로써 사실은 정신적인 불순함을 관찰하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에서 달아나는 대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대면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불순한 생각이 힘을 잃고 나를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불순한 생각은 사라지고 평화롭고 행복하게 됩니다.
자기 관찰 기법은 우리에게 내면과 외면, 두 가지 측면에서 실재하는 바를 보여줍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사물을 감각적인 눈으로만 보고 내면의 진리를 놓칩니다. 나는 항상 불행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았습니다. 즉, 나는 항상 외부에 실재하는 바를 비난했고, 바꾸려 했습니다. 내면의 실재는 무시하고, 고통의 원인이 내부에, 기쁘고 불쾌한 느낌에 대한 나 자신의 몸매한 반응들 속에 있다는 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훈련을 통해 동전의 다른 면을 볼 수 있게 됩니다. 내 호흡을 느끼고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고 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관찰하면서 그것에 반응하기를 멈춤으로써 내 불행이 확장되는 것을 멈춥니다. 그저 흘러가게 합니다.
이 방법을 더 많이 연습할수록, 더욱 빨리 부정적인 것에서 빠져 나올 수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점차로 마음은 불순함이 없어지고 순수하게 됩니다. 순수한 마음은 언제나 가득한 사랑, 다른 사람을 위한 이기심 없는 사랑, 다른 사람의 실패와 고통에 대한 넘치는 연민, 그들의 성공과 행복에 대한 넘치는 기쁨, 어떤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가득한 평온함입니다.
이 단계에 이르렀을 때 모든 삶의 방식은 변화하기 시작하죠. 다른 사람의 평화와 행복을 방해하는 어떤 말이나 신체적인 행동도 더 이상 샐행 불가능합니다. 그 대신 균형 잡힌 마음으로 스스로 평화로울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평화롭게 만듭니다. 이런 사람의 주변은 평화와 조화로 가득차 있기에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합니다.
내면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과 직면하여 균형을 유지한느 법을 배움으로써 외부 상황에서 부딪히는 모든 것에 초연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초연함은 세상 문제에 대한 도피주의나 무관심이 아닙니다. 위빠사나 명상가는 타인의 고통에 좀 더 민감하고 자기가 할 수 있는 방법 무엇으로든지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짜증을 내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사랑과 연민 그리고 평온함이 충만하여 하는 것입니다. 그는 성스러운 무심함을 배웁니다. 즉, 그는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면서 다른 사람을 돕는데 완전히 몰두하고, 완전히 관여하는 법을 배웁니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다른 사람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 일하면서도 평화롭고 행복함을 유지합니다.
이것이 부처가 가르친 삶의 기술입니다. 그는 어떠한 종교나 '주의'를 만들지도 가르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중생들에게 어떤 몽매하거나 공혀한 형식, 의식이나 예식을 행하도록 지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내면의 실재를 성찰함으로써 있는 그대로의 본성을 관찰하라고만 가르쳤습니다. 무지하면 자신과 타인에게 해가 되는 행동을 계속하게 되지만, 실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지혜가 생겨나면 이러한 습관적인 반응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몽매하게 반응하는 것을 멈출 행동, 즉 진리를 보고 이해하는 균형잡힌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을 할 수 있게 되지요. 이런 행동은 긍정적일 수 밖에 없고 자신과 다른 사람엑 창조적이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때 필요한 것은 모든 현자들이 하는 충고인 '너 자신을 알라'입니다. 자신을 알아야 하는데 사상과 이론적인 수준, 지적인 수준에서만 아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듣거나 읽은 것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식의 감정적이거나 헌신적인 차원에서만도 아닙니다. 이러한 앎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실제적인 수준에서 질재를 알아야만 합니다. 정신적이자 육체적인 현상의 실재를 직접 체험해야 합니다. 이것만이 우리을 불순함에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이 자기 자신의 실재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 자기 관찰의 방법을 '위빠사나 명상'이라고 일컫습니다. 부처가 살던 시대의 인도 언어로 '파사나'는 보통 부릅뜬 눈으로 보는 것을 의미하는데 '위빠사나'는 단지 눈에 보이는 대로가 아니라 진실로,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관찰한다는 의미입니다. 겉보기 진리는 온전한, 정신적이자 육체적인 구조에 대한 궁극적인 진리에 이를 때까지 관통되어야만 합니다. 이 진리를 경험할 때, 몽매하게 반응하지 않는 법을 배우고 불순함이 생기는 것을 멈추게 되는데 오래된 불순함들은 점진적으로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모든 불행에서 벗어나 행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위빠사나 명상 과정에서 받는 훈련에는 3단계가 있습니다. 우선, 다른 사람의 평화와 조화를 방해하는 신체적이거나 언어적인 그 어떠한 행동도 삼가야 합니다. 자신을 불순한 생각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고자 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불순함을 증대시키는 언행을 지속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윤리 규칙의 준수는 이 훈련의 기본적 첫 단계입니다. 살생하지 말고, 도둑질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고, 거짓말을 하지 말고, 약물을 사용하지 마십시오. 이러한 생동을 삼감으로써 생각이 평온해져 다음 단계를 이행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음 단계는 한 가지 대상, 즉 호흡에 마음을 고정시키는 훈련을 함으로써 지친 마음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자신의 주의를 가능하면 오랫동안 호흡에 집중시키도록 노력합니다. 이것은 숨쉬기 운동이 아니며 숨을 조절하는 것도 아닙니다.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자연적인 호흡 그대로를 관찰하는 것이죠. 이렇게 하면 마음이 더욱 평온해지고 더 이상 폭력적이고도 부정적인 마음에 지배당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마음을 집중하여 그것을 예민하게 만들과 관통하는 힘을 얻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도덕적인 삶을 살고 마음을 다스리는, 첫번째 두 단계는 그 자체로도 필요하고 유익한 것이지만 자신의 본성으로 들어가는 통찰력을 개발함으로써 불순한 마음을 정화하는 세 번째 단계가 없으면 자기 억눌림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자기 내분의 감각으로 나타나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마음과 물질의 형상을 체계적이고 냉정하게 관찰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실재를 경험하는 이것이 바로 위빠사나인 것입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 그것의 절정인 자기 관찰에 의한 자기 정화입니다.
이것은 누구나 행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고통의 문제를 안고 있죠. 고통은 종파적인 아닌 보편적인 치료법을 요하는 보편적인 질병입니다. 한 사람이 분노로 괴로워할 때, 그것은 불교식 분노도, 힌두교식 분노도, 기독교식 분노도 아닙니다. 분노는 분노입니다. 이런 분노로 인해 동요할 때 이 동요는 기독교적인 것도, 힌두교적인 것도, 불교적인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보편적인 것으므로 그 치료법 또한 보편적이어야 합니다.
위빠사나는 그것에 대한 치료법입니다. 다른 사람의 평화와 조화를 존중하는 삶의 규칙을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부정적인 마음을 없앰으로써 가능한, 자신의 실재를 꿰뚫어보는 예지를 발전시키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위빠사나는 보편적인 길입니다.
내면의 진리를 관찰함으로써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적이고도 경험적인 차원에서 자신을 아는 것입니다. 이를 행함에 따라 불순함의 불행으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조잡하고 외부적이며 외면적인 진리로부터 마음과 물질의 궁극적인 진리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때 초월하게 되고, 마음과 물질, 시간과 공간, 그리고 조건적인 상대성 저 너머에 있는 진리를 경험하게 됩니다. 즉, 모든 불순함과 불결함, 그리고 모든 고통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유로움이란 진리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궁극적인 진리에 무슨 이름을 붙이든지 간에 상관없으며 그것은 오직 모든 이들의 마지막 목표일 뿐입니다.
모두가 이 궁극적인 진리를 경험하게 하소서.
모두가 그들의 불순한 생각과 불행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진정한 행복과 진정한 평화와 진정한 조화를 향유하게 하소서.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 S.N. Goenka
* 이 글은 스위스 베른에서 S.N. Goenka가 강연했던 내용 중 발췌한 것임
고엔카는 버마(미얀마) 출생의 인도인으로
위빠사나를 대중적으로 알리는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버마에서 나고 자란 그는 우바킨 Sayagyi Ba Khin에게 14년간 지도 받은 후
위빠사나의 명맥이 거의 사라졌던 인도에
위빠사나 명상센터를 세우고 보급에 나섰다.
'深耕細作 > 마음을 통하여 세상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SBS스페셜] ③ 유시민 "아부로 출세하는 시대 지났다" (0) | 2010.01.25 |
---|---|
기독교인은 왜 `예수` 를 믿지 않을까~ (0) | 2010.01.25 |
삶의 기술, 위빠사나 명상 (0) | 2009.12.16 |
스스로 신앙하는 이의 자세 (0) | 2009.10.12 |
옛 항아리를 고르며 (0) | 2009.09.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