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금장 / 조현태
작년 늦은 가을날 흥해 장에 갔었다. 얼른 보아도 팔십은 됨직한 할머니께서 시금장을 팔고 있었다. 일부러 하얀 염색을 한 것처럼 검은 머리카락 한 가닥 찾아볼 수 없는 백발이 우리 고모님을 닮았다. 주섬주섬 농담과 가벼운 욕설도 섞어가며 하시는 말씀도 비슷했다. 시금장을 맛보라며 손가락으로 쿡 찍어서 내 입에 넣어주실 때는 고모님을 만난 듯이 반갑기까지 했다.
고모님도 시금장을 많이 담갔고 친정 올 때마다 넉넉하게 가져와 조카 입에 찍어 넣어 주었었다. 입담도 좋아서 시금장 담는 방법을 옛날이야기처럼 서리서리 풀어놓았다.
땅에서 소득과 먹을거리를 얻어내는 일을 통틀어 농사라고 한다면 농사를 하기 위해서 준비하는 여러 가지 일 중에서 퇴비 만드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농촌에서 퇴비로 인해 얻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토양을 비옥하게 해 주는 것은 물론이고, 가축과 사람이 배출하는 모든 배설물을 처리할 수 있다. 또한 부엌에서 타고 남은 재나 음식물 쓰레기 까지도 퇴비로 재생한다. 화학비료보다 친환경적이고 농작물이 건강하게 자라는 것은 당연하다. 뿐만 아니라 특유한 맛을 자랑하는 시금장도 이 두엄 더미 속에 묻어서 만드는 것이다.
두엄을 만드는 일은 마구간도 쳐 내고 왕겨랑 풀도 중간 중간 섞으며 변소에서 똥물도 퍼다 켜켜이 뿌리고 꼭꼭 다져 지붕 높이만큼 쌓아올린다. 이러한 두엄 더미가 마당 한쪽에 생기면 몇 주간은 비위생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고약한 냄새를 풍긴다.
두엄이 잘 발효되려면 여러 차례 뒤집고 골고루 섞으며 산소를 공급해 주어야 한다. 엄청난 양으로 쌓인 두엄 더미를 쇠스랑과 거름 삽으로 일일이 뒤집고 섞으려면 장정 두 세 명이 며칠을 꼬박 해야 할 일이다. 두엄은 그렇게 두 세 차례 고된 노동을 요구하고 나서야 고약한 냄새에서 새큼한 냄새로 변하면서 열을 낸다.
시금장 준비는 보릿겨로 만든 깨주메기를 아궁이에 슬쩍 구워서 말린 후 부드럽게 갈아 걸쭉한 된장처럼 만든다. 거기에다 풋고추, 가지, 무청, 시래기, 덜 익은 참외랑 무말랭이까지 그저 있는 대로 넣어 버무린다. 거무죽죽한 색깔에 온전히 익지도 않은 것들과 버무려서 탁해 보이지만 맛있게 잘 익어 주기를 기대하면서 항아리에 담고 뚜껑을 덮은 후 황토 흙으로 완전히 밀봉한다.
두엄더미에서 열기가 얼굴에 후끈 끼칠 때 쯤 깊이 파헤치고 항아리를 묻는다. 그리고 약 일주일이 지나 다시 두엄 뒤집는 작업을 할 때 묻어두었던 항아리를 조심스럽게 꺼내면 새콤 짭짤한 시금장이 탄생되어 나온다고 했다. 거름에 묻어서 익힌다 하여 거름장이라고도 부르던 시금장을 고모님이 참 맛깔스럽게 담그셨다.
고모님은 포항 학산동 어느 골짜기로 출가하셨다. 세 남매를 낳아 막내가 젖도 떼기 전에 고모부님이 세상을 떠나셨다. 그 후 모든 것이 익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결혼하기 전에 농사를 해본 어설픈 경험을 토대로 시금치를 많이 재배했다. 농사에 없어서는 안 될 퇴비지만 여자 몸으로 만들기가 너무 과중한 일이었다. 시금치는 자라는 데로 손질하여 죽도시장까지 이고 가서 팔아야 했다. 시금장도 만들어 시장에 내어 팔았다. 돈이 되는 것이면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겨울에도 구들목에 지친 몸을 뉘어볼 겨를이 없었다. 다음 농사에 필요한 퇴비를 만들어야 했다. 심지어 이른 새벽이면 망태기를 메고 온 동네를 다니며 개똥을 주워 모으기도 했다.
넉넉지 못한 살림살이에 애쓰고 챙길 것은 수두룩했다. 시장에서 부대껴야 할 장사 일에, 청상에 홀로 가야할 인생길에, 농사에, 자녀들 뒷바라지에, 무책임하게 떠나버린 고모부님의 역할까지 어설프고 어정쩡하기만 했다. 마치 시금장에 버무려지는 것들은 그냥 먹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버리기도 아까운 어정쩡한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끌어안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내팽개칠 수도 없는 생활이면, 억지로 견딜 만한 열기 속에서 곰삭아 가는 시금장의 그것과 무엇이 다르랴.
그러나 그 곰삭는 과정을 다 거치고 잘 발효되어 밥상에 오르는 시금장과 같이, 당신의 뜨거운 가슴 속에서 번뇌와 고난으로 켜켜이 곰삭아 나온 후 희생과 사랑이란 특별한 맛으로 온 가족에게 기여했던 것이다.
시금장은 항아리 밖에는 냄새와 지저분한 퇴비로 둘러싸여 있지만 그런 요소들은 항아리와 황토로 차단하고 필요한 열기만 받아들여 끝내 고유한 맛을 낸다. 그렇듯이 고모님의 열악하고 역겨운 환경은 앙다문 입과 동여맨 허리띠로 차단하고 수고한 대가를 제공해 주는 농산물의 정직함과, 건강하게 잘 자라면서도 끊임없이 응원하는 자녀의 고마움에 힘입어 끝내 행복을 생성해 냈던 것이다.
시금장은 보잘 것 없던 모습에서 고동색에 윤기가 나며 상큼한 향기까지 풍기는 맛있는 음식으로 탈바꿈했다. 그 향기는 부족하고 설익은 모습에서 역경을 딛고 다시 태어난 승리의 향기인지도 모른다. 내가 그 향과 맛을 좋아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고모님의 생애는 시금장과 흡사했다.
고모님이 처음부터 강하고 담대하지 않았다. 힘겨운 삶의 현장에서 애쓰고 노력하는 곰삭음의 훈련을 어렵게 거치고야 강하고 담대해졌으리라. 시금장의 그 독특한 맛은 고모님의 가슴과 같은 맛이다.
이제 내가 사다 먹는 시금장의 그 정겨운 맛 속에는 언제나 고모님이 함께 계신다. 올 가을에도 흥해 장에 그 할머니가 나오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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