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종교를 뒤엎는 신약성경의 상징들
예수 그리스도와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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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를 뒤엎는 신약성경의 상징들
종교란 부패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왜 예수는 종교를 뒤엎으려고 했을까? 오늘날의 기독교는 예수가 원했던 기독교일까? 본질적인 기독교란 무엇인가! 예수는 고착되어버린 종교를 뒤엎는데 십자가 희생을 치렀다. 이천 년 전에 예수가 뒤엎어버린 종교를 기독교가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누군가 상위 질서에 도전을 무릅쓸 때마다 천국에서는 기쁨이 있다.
우리가 예수의 가르침에 관해 알고 있는 것은 아름다운 만큼이나 기괴하다는 것이다. 예수는 단지 하나님, 생명, 그리고 구원에 대해서 가르친 것이 아니었다. 예수는 자기 자신에 대해, 그리고 어떻게 자신이 우리를 하나님과 연결시킬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가르쳤다. 예수는 자신을 거룩한 세계로 연결되는 통로로 여겼다. 구체적으로, 그의 죽음이 그런 연결을 현실화시킬 것이라고 가르쳤다(마 16:21-25; 눅 18:31-34).
예수는 비유와 가르침뿐만 아니라, 당시의 중요한 상징들을 재구성함으로써 그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죽기 전에 예수는 제자들에게, 매우 종교적인 형태이기는 하지만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두 가지의 종교를 뒤엎는 상징들, 즉 반종교적인 행위들을 남겨 줬다.
첫 번째는 세례였다. 사람들이 성전에 가서 죄 사함을 얻으려 할 때는 동물들로 희생 제사를 드렸을 뿐만 아니라 종교 의식을 통해 물로 자신들을 깨끗하게 하였다. 그들은 일상 속에 접한 영적인 부정함을 씻어내기 위해 욕조에서 자신들을 정결하게 했다. 몸 전체를 씻어 정화하는 의식 가운데에서, 많은 종교적인 사람들을 정결함에 대한 헌신의 상징으로 손을 씻었다.
세례 요한의 협력 속에서 예수는 이 상징을 받아들였지만, 이것을 성전으로부터 사람들의 공동체 속으로 옮겨 물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 가능하게 했다. 예수 사역에 유입된 세례는 종교적 제도로부터 벗어나서 사람들이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상징하게 되었다. 다시 새롭게 된 이 상징은 속죄를 집행하기 위한 특별한 제사장이나 성직자가 필요 없다. 오히려, 동료가 되어 영적인 공동체로 들어오는 것을 환영하는 방식으로서, 영적인 형제 중 아무나 세례를 줄 수 있었다(행 8:26-39). 그 뿐만 아니라 이 상징은 개인의 믿음생활이 시작되는 하나의 사건이 된다.
세례가 더 이상 정결의식 제도의 요소가 아니기 때문에 세례는 반복되어 시행될 필요가 없었다. 세례의 일회성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단번에 수용하셨다는 것을 상징한다. 이 상징의 단순성은 아름답다. 불행히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오늘날 세례를 공식적인 ‘교회’ 건물의 신성한 장소에서 전문 성직자가 집행해야 하는 특별한 의식으로 여기고 있다.
예수는 더 좋은 방법을 제시한다. 예수가 새 의미를 불어넣은 두 번째 상징은 유월절 의식이라고 불리는 유대인의 유월절 식사였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이 재구성된 사건을 성찬식, 또는 주님의 성만찬으로 거행한다. 제자들과의 마지막 유월절 식사 때, 예수는 자신의 죽음의 의미와 그에 대한 믿음으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모두가 이해할 수 있도록, 만찬에 새로운 의미를 불어넣었다.
체포되어 십자가에 달리기 몇 시간 전에, 예수는 그의 제자들이 그 의미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잊지 못하게 될 방법을 찾았다(마 26:17-30; 막 14:12-26; 눅 22:7-23). 이 최후의 만찬을 통해 예수는 앞으로 올 모든 세대를 위해 그를 기념하고, 그의 죽음을 중심으로 사람들 스스로 삶을 회개하게 하는 방법을 남겼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3-26)
계속하여 기념하라고 예수가 명령한 유일한 행위인 주님의 만찬은 그의 출생이나 삶, 또는 그의 말씀이나 업적이 아닌 그의 죽음과 부활만을 극적으로 표현한다. 명백하게 예수는 그의 십자가형이 제자들의 믿음의 지주가 되기를 원했다.
유월절 식사는 시작부터 평범한 식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피 흘림을 통해 얻어진 것으로서 억압으로부터 자유롭게 됨을 상징적으로 경축하는 것이었다. 오래 전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해방시켰으며, 이런 사실을 유대인들은 유월절 식사로 경축했다. 제일 먼저 태어난 것의 죽음, 동물 희생의 피, 그리고 그런 것들을 통해 이스라엘이 얻은 자유는 그 사건을 기념하는 식사에 모두 포함된 요소이다.
예수는 기적적으로 얻은 자유를 축하하는 이러한 유월절 식사 가운데 떡을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눅 22:19)고 했으며 포도주를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고 했다. 거기에 덧붙여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고 말했다.
새 언약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새 협정이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새로운 방법이다. 용서함을 받기 위한 새로운 수단이다. 우리의 창조주와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다. 종교적인 어떤 구조가 세워지는 것과 무관하게 이 모든 것이 주어진다.
최후의 만찬에 부여된 새로운 고무적인 상징을 통해, 예수는 제자들에게 무엇으로 희생 제사 제도의 피를 대체할 것인지 보여 준다. 그것은 바로 예수 자신의 피다. 예수는 성전 제도를 비난했고, 이제는 성전의 대체물로서, 그리고 다른 모든 희생 제사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마지막 희생물로 자신을 내놓는다. 예수는 종교를 자신으로 성공적으로 대체했다고 말하고 있다.
제사장과 희생 제사의 새로운 제도로 대체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중요하다. 예수가 초대하는 이상적인 식사는 예수 자신이 하나님을 향한 길이라는 것을 반복적으로 가리키고 있고, 새로운 기관(교회)으로 옛날 기관(성전)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며, 새로운 제사장 제도로 옛 제사장 제도를 대체하는 것이 아님을 거듭 밝히고 있다. 예수를 통해 하나님은 종교를 자신으로 대체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한 가지 동기로 떡과 잔을 나눈다. 그 동기는 예수가 우리에게 남겨준 것으로, 예수가 성취한 모든 것에 우리의 초점을 다시 맞추기 위해 그를 기념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찬식의 목적이다. 우리는 의식을 통해 죄 사함을 얻으려고 성찬식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죄 사함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다.
우리는 그 혼자만이 사람들을 하나님과 연결시켜 줄 수 있는 교회의 제사장을 만남으로써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셨으며, 그 과정에서 모든 제사장과 예언자들을 지나쳐버리셨다. 우리는 예수를 기념하고, 우리의 생각을 다잡으며, 예수의 혁신적인 메시지를 우리 마음속에 새기기 위해서 성찬식에 참여한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우리는 성찬식을 통해 무엇을 ‘기념’해야 하는가?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나는 이 상징의 충격 지수를 평가하고 싶다. 당신이 제자들 입장에서 이 말을 처음 듣는다고 생각해 보라.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시체를 먹는 흉내를 낼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건 정말 섬뜩하다. 사태는 더 심해진다. 예수는 매우 분명하다. 이제는 자신의 피를 마시라고 한다.
예수는 이전에도 가르침을 주며 자신의 살과 피를 먹는 개념에 대해 한 번 언급한 적이 있었고, 그 때문에 몇몇 제자들이 떠나는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요 6:51-66). 요한은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 하더라”(요 6:66)고 기록하고 있다. 이 일이 있은 후 예수는 “살을 먹고 피를 마시라”는 메시지를 폐기해야 할 것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각을 바꿔 메시지를 다시 포장하고 그 상징성을 보다 덜 공격적인 것으로 만들기보다, 예수는 그 섬뜩한 메시지의 볼륨을 높인다. 단지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다. 예수는 제자들을 초청해서 이 상징적이고 반종교적인 가르침을 실제로 행하는 데에 몸으로 참여토록 했다.
이것을 분명히 하자. 젊은 유대인들에게 부탁해서는 안 될 한 가지 일이 있다면, 그것은 피를 마시는 것이다. 인간의 피든 동물의 피든, 진짜거나 상징적이거나 상관없다. 구약성경은 그 어떠한 형태로도 피를 섭취하는 것을 금한다. 이것은 명백한 규범이다. 고기는 피를 모두 뺀 상태여야만 섭취할 수 있다.
“이스라엘 집 사람이나 그들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 중에 무슨 피든지 먹는 자가 있으면 내가 그 피를 먹는 그 사람에게는 내 얼굴을 대하여 그를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너희 중에 아무도 피를 먹지 말며 너희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이라도 피를 먹지 말라.”(레 17:10-12)
제자들에게 피를 마시라고 시키는 것은 단순히 그들의 감수성을 위협하는 일 이상이다. 그것은 예수를 기꺼이 급진적으로 따르게 함으로써 직접적으로 종교적 규범을 포기하게 하는 것이다. 예수는 제자들을 선택의 기로에 서게 한다. 유월절 식사에 참여하게 하여 새롭게 다시 의미를 부여하는 상징으로써 의도적으로 성경의 율법과 충돌시키는 것은 신성모독이다.
여기서부터 돌이킬 수 없다. 예수는 이미 굳어진 제자들의 종교적 신앙에 단순히 그의 가르침을 추가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의 영적인 통찰력을 종교에 접붙여 뽐내라고 우리를 초청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절충주의가 끼어들 틈이 없다. 하나님을 향해 가는 길로서 예수의 방식과 종교적 전통은 혼합될 여지가 없다. 예수는 제자들이 기존의 종교적 정체성에서 벗어나 그의 새로운 길에 전적으로 헌신할 수 있도록 초청한다.
예수는 현재 우리의 종교적 실천을 개선하기 위해 고용할 수 있는 영적 상담자와 같은 역할을 하지 않는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배타적이고 헌신적이며 열정적인 관계 속에서 자신을 붙잡으라고 우리를 부른다. 그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로서 다른 모든 관계를 영원히 이차적인 것으로 만든다.
물론 개인의 종교적 유산이 유서 깊고 굉장할수록 예수를 위해 그것을 버리는 것은 어려워진다. 자신의 종교적 뿌리가 멋질수록, 자신의 종교와 같이 하자고 그저 예수를 초청하고 싶을 것이다. 이것은 마치 젊은 여인이 가족과 가문을 너무 사랑해서, 결혼하여 독립하기보다 새신랑을 움직여 단순히 한 명의 가족 구성원을 더 만드는 것과 같이 된다.
자랑스러운 ‘기독교’라는 꼬리표가 붙어있는 배경에서 자란 사람들은 그리스도로부터 기독교 문화를 분리하는 세밀한 작업에 가장 큰 어려움을 느낄 수 있다.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모든 것을 예수의 종교를 뒤엎는 삶의 방식에 복종시키기보다, 예수를 그들에게로 초청하여 예수의 이름으로 종교와 정치적 안건을 축복하는 가장 최악의 경우에 처할 수도 있다.
제자들의 감정적 입장에 서 보는 것이 이해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자신의 피를 마시라고 했을 때, 곧 그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종교적 규범과 의식을 깨뜨리라고 요구했을 때,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제자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친구가 이것을 정말 마실 것인가?’ 하고 의심했을 것이라 상상해 본다. 그 순간 여러 생각이 떠올랐을 것이다.
예수가 새롭게 다시 정의를 내린 유월절 식사를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예수를 떠나 반대할 것인가? 예수가 종교라는 안전지대로부터 자신을 끌어내어 지도에 없는 영적 영역으로 인도하는 것을 알면서도 전적으로 따를 것인가? 새 언약의 포도주를 마심으로써 마침내 기꺼이 모든 것(다시 규정된 유월절, 십자가에 처형된 메시아, 죽음을 통한 삶의 방식과 희생을 통한 자유)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종교적 전통의 안전지대로 돌아갈 것인가?
이 질문들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과 앞으로 예수를 따르게 될 사람들이 씨름해야만 하는 문제다. 예수는 의도적으로 우리를 결단의 기로에 서게 한다. 과연 우리는 그의 반종교적인 방법을 신뢰함으로써 다른 모든 구원의 제도를 버릴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종교를 뒤엎는 상징들을 대할 때 우리의 선택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생각해 보라. 오늘날 여러 기독교 교파는 유아세례를 주지만, 그것은 예수의 시대나 최초 기독교인들의 관습은 아니었다. 세례는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 안, 또는 “그리스도 안으로”(갈 3:27) 잠기고 싶다는 갈망을 표현하는 개인적 선택의 상징인 것이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는 모두가 볼 수 있게 상 위의 떡을 갈라놓는 것만으로 그의 뜻을 나타낼 수도 있었다. “보라, 너희를 위해 부서진 나의 몸이다.” 그 다음 포도주 한 잔을 바닥에 부으며 “너희를 위해 쏟아진 나의 피다.”라고만 말할 수도 있었다. 그것이 오히려 그리스도의 희생을 선명하게 나타내는 것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우리들 스스로가 선택해 자신 안에서 떡과 포도주를 취하기를 원한다. 우리에게 역할이 주어진 것이다. 예수는 우리에게 그의 생명과 사랑을 주지만, 우리가 수동적으로 의식만 준수하는 한 우리를 위해서나 우리를 향해서나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는다. 우리는 기꺼이 예수의 생명과 사랑과 거룩함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친밀함’은 상징들을 생각할 때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다. 세례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안으로 들어가고 사랑으로 둘러싸인다. 성찬식을 통해 그의 사랑과 생명과 거룩함이 우리 안에 들어오고 우리를 새롭게 한다. 우리는 거룩한 사랑 안에 잠기는 것이고, 우리는 그 곳에서 그것을 마시는 것이다.
증거의 말씀을 듣고 자신이 종교에 사로잡혀 생명 밖에 있음을 눈치 챘다면 예수께서 종교와 어떻게 싸웠으며, 종교를 어떻게 뒤엎었는지에 대해서 성경을 다시 읽어보기를 권한다. 예수는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느냐?”고 묻는 율법교사에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눅 10:26)
헐몬산의 이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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