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역사적 예수 탐구를 비평한다
역사적 예수 탐구를 비평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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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목 / 고신대 대학교회(www.daehaak.org ) 담임, 부경성경연구원장 들어가면서 요 7:40-43에 보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유대인 무리 가운데, 예수님의 정체(identity)에 대해 쟁론(분열, 틈)이 벌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이 쟁론은 계속되고 있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그 결과만 놓고 보면 부정적이지만, 역사적 예수 탐구가 현대인의 관심을 끈 이유는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후기)계몽주의의 영향 아래에서 복음서를 읽는 (주로 서구나 복음이 전해진 곳의)현대독자들은 복음서에 묘사된 예수님을 영접하거나 따르려고 선 듯 나서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는 현대의 독자들은 예수님을 간단히 거부하거나, 예수님 없이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것 같다. 환언하면, 복음서에 제시된 예수님을 액면 그대로 수용하기에는 현대인의 세계관이 용납하지 않지만, 그 예수님을 그냥 내버리는 것도 어렵다는 말이다. 여기서는 역사적 예수 탐구의 진행 상황을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1. 구(舊) 탐구 (Old Quest= 1차 탐구) 19세기와 20세기 초엽의 합리주의자들은 예수님의 삶이 초자연적인 혹은 유일무이한 진리를 포함할 수 없다고 결정했다. 이유는 그들에게는 이성이 진리와 사고의 근원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역사가 종교에 대해 유일무이한 특별한 의의를 가진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것과 관련된 몇몇 대표 주자들을 살펴보자: 1.1. 헤르만 사무엘 라이마루스(Hermann Samuel Reimarus, 1694-1768) 알버트 슈바이처의 책 ‘역사적 예수 탐구’의 독일 제목은 ‘Von Reimarus zu Wrede’(라이마루스에서 브레데까지)이다. 이 책에서 슈바이처는 라이마루스를 역사적 예수 탐구의 논의를 위한 시작으로 본 것 같다. 라이마루스는 독일의 함부르크 아카데미 김나지움의 근동 언어학 교수였고 이신론자였다. 1778년에 Lessing에 의해서 유고집으로 출판된 그의 글은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의 목표에 관하여’이다. 이 글에서 라이마루스는 예수님과 (후에 제자들에 의해 계속된)기독교가 목표하는 바가 달랐다고 주장한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순전히 정치적인 의미로 해석했던 실패한 혁명적 열심당원(revolutionary Zealot)이었다. 그 이유는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나라를 어떤 뜻으로 말씀했는지 설명하지 않으셨으므로, 유대인 청중들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 정치적으로 생각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유대교와의 단절을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찾아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 기간 동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정치적으로 임할 것을 두 번이나 말씀하셨지만 이루어지지 않은 실패자였다(마 10:23). 따라서 라이마루스에 의하면 나사렛 예수님은 현대 종교적 신앙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으신 분이다. 기독교는 예수님의 제자들의 기만에 의해 설립된 것으로 본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면서 얻었던 것처럼 생각한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실패한 예수님을 그대로 수용할 수 없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 와서 예수님의 부활을 사실처럼 꾸며내었고 부활한 메시아의 재림 사상을 도입하여 메시아의 초림의 목적을 영적이고 윤리적인 측면에서 재해석했다. 라이마루스는 ‘신앙의 예수님’과 ‘실제 역사적인 예수님’을 날카롭게 구별했다. 즉 그에 의하면 복음서들은 역사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초기 기독교의 신앙의 기록들이기에, 실제 역사를 연구해 보면 판이하게 다른 그림을 발견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N.T. 라이트(2004:50)가 지적했듯이, 라이마루스의 탐구는 기독교 신앙이 토대로 삼을 수 있는 예수님을 발견하려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신앙이 실제의 나사렛 예수님을 토대로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이 주장을 평가해 보면 이런 날카로운 구별은 불가능하다. 제자들이 쓴 복음서가 어떻게 (실제 역사적인 예수님에 대한)목격자적 증언을 완전히 포기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예수님의 메시지를 고의적으로 제자들이 변개할 수 있었단 말인가? 역사적 예수님 없는 신앙의 그리스도는 없다. 1.2. 파울루스(H.E.G. Paulus, 1761-1851): 파울루스는 스피노자와 칸트의 영향을 받았으며, 생의 마지막 40년간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가르쳤다. 그는 ‘예수傳’(The life of Jesus)의 서문에서 전통 기독교에 대한 비판 특별히 전가와 대속의 교리에 대해 격렬히 논쟁했다. 그는 19세기 자유주의자의 선구자로서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과 기독교의 본질을 청중의 윤리적인 변화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가져오는 것으로 보았다. 그에게 예수님은 윤리적인 모범을 보인 윤리 선생일 뿐이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는 실신설 혹은 기절설을 따름. 이적은 종교적 중요성을 지니지 않는 것으로 보기에, 이것을 합리적으로만 설명하려고 한다. 1.3. 헤겔주의적 재구성을 추구한 사람들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은 역사를 ‘세계정신’(Weltgeist)의 점진적인 자기실현이라 보았다. 세계정신이 자기실현에 도달하는 이 역사적 과정에서, 초자연적인 것이나 신비적인 것이 들어설 여지는 절대로 없다. 그래서 “현실적인 것은 합리적인 것이요 합리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다”는 말이 있다. 따라서 헤겔의 철학은 포이에르바하, 엥겔스, 마르크스, 니체 등에게 무신론의 길을 열어 주었다. 1.3.1. 쉬트라우스(David Friedrich Strauss, 1808-1874) 기독교를 합리주의, 특히 사변적인 헤겔 철학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선험적으로 이적과 관련된 요소를 다 제거하였다. 그는 ‘The life of Jesus critically examined’(비평적으로 연구된 예수님의 생애, 1835)를 썼다. 슈트라우스는 신화의 개념을 복음서 비평에 소개한 사람이다. 하지만 슈트라우스가 신화론의 창시자는 아니었다. 하이네(Christian Gottlob Heyne, 1729-1812)는 ‘인류의 유아기적 사고와 표현의 보편적 양태’로서 신화의 기원과 본질에 관한 포괄적 이론을 발전시켰다. 요한 고트프리히 아이히호른(1752-1827)과 요한 필립 가블러(1753-1826)가 각각 구약과 신약 연구에 신화론을 적용했다. 슈트라우스는 F.C. Baur의 문하생으로서 복음서를 연구했으며 1831년에 헤겔의 강좌를 들었다. 슈트라우스는 복음서가 신뢰할 수 있는 역사적 기록들이라는 전제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복음서의 기본적인 역사 구조까지를 포함한 복음서 전체 설화에 신화개념을 적용했다. 그렇다면 이 신화들은 어떻게 발생했는가? 그에 의하면 복음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에 의해 기록되지 않았다. 따라서 목격된 기록들이 아니기에 신뢰할 수 없다. 복음서의 기록 연대는 2세기다. 그에게 부활은 핵심적인 신화였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역사적인 사건이며 어떤 것이 신화적인 것인지 구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c. 어떤 사건의 역사성은 그 사건 기록의 일관성과 다른 이야기들과의 조화에 비추어 시험되어야 한다. 위의 주장을 평가해 보자. 이런 기준들은 피상적이고 합리주의의 영향을 받은 결과이다. 복음서의 기록을 마음대로 칼로 자르고 풀로 붙이는 작업(the scissor and paste approach)에 유용한 기준일 뿐이다. Ben F. Meyer는 기준(criteria)라는 말 대신 역사적인 지리에 대한 리트머스 시험(litmus test: 그것만 보면 사태 혹은 본질이 분명해 지는 일)이라기보다는 진정성을 지시한다는 의미에서 ‘지침’(index)이라 부르는 것을 선호한다. 쉬트라우스의 ‘갈릴리 가설’(Galilean hypothesis)은 예수님의 죽음이 제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메시아 신앙을 무효로 만들었지만,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돌아간 후에(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제자들의 신앙이 다시 회복되었기에, 제자들의 메시아신앙과 예수님의 죽음을 구약의 구절(예. 시 22; 사 53)을 들어 조화시키려 했다는 가설이다. 즉 부활절 이후의 신앙이 예수님의 사역을 재해석했으며, 이런 재해석되고 채색된 신화적 내용이 복음서에 기록되었다는 주장이다. 위에서 언급한 신화의 기준이 합리주의적이고 임의적이기에, 여기에 기초한 갈릴리 가설 역시 합리주의적이고 피상적이다. 1.3.2. 브루노 바우어(Bruno Bauer, 1809-1882) 헤겔 좌파인 바우어는 예수님이 생존했다는 사실조차도 부정한다. 그의 주장 즉 ‘복음서는 문학적 허구(literary fiction)에 불과하다’는 그를 적그리스도인으로 만들었다. 그는 기독교의 기원과 예수님에 관한 전승을 교회의 공동체 의식의 산물로 보는 사회학적인 설명을 제공한다. 1.3.3. 페르디난드 크리스티안 바우어(Ferdinand Christian Baur, 1792-1860) 튀빙겐학파의 수장인 바우어는 마태복음은 유대-기독교적 문서이므로 최초의 복음서이고(正), 바울의 기독교는 롬, 고전후, 갈에 표현되었고(反), 나머지(막, 요, 눅, 행, 히, 나머지 바울 서신)은 AD 150년경의 종합적 관점을 반영한다고 보았다(合). 따라서 신약 문헌을 당파의 입장을 반영하는 당파문헌으로 보았다. 여기서 헤겔의 정반합의 변증법이 두드러진다. 바우어에 의하면, 예수님의 가르침은 철저하게 도덕적인 것이었고, 청중의 도덕적인 능력을 강조하는 인간중심적인 것이었다. 하나님 나라는 모든 개인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라는 절대적인 도덕적인 명령의 힘에 의해 명령받는 자신을 감지하는 곳에 있다고 주장한다. 2.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의 리츨주의적 자유주의 ‘자유주의’라는 용어는 협소하고 특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어야지 비정통-반보수적인 것으로 광의로 사용되면 곤란하다. 즉 자유주의는 19세기 중-후반에 일어난 특정한 개신교 사상학파를 가리키는데, 이들은 윤리선생으로서의 역사적 예수님과 예수님의 가르침에 나타난 종교적이며 비종말적이며 도덕적인 가치에 두드러진 (그리고 편향된)관심을 보였다. 참고로 이 시기에 마가복음 우선설(Markan priority hypothesis)이 Karl Lachmann(1835), C.H. Weisse(1801-1866), H.J. Holtzmann(1832-1910)에 의해 제안되었다. 2.1. 알브레히트 리츨(Albrecht Benjamn Ritschl, 1822-1889) 리츨은 F.C. Baur의 제자이었으나 스승 바우어의 비판가이기도 하다. 그는 튀빙겐학파의 허점들인 사도집단 사이의 대립과 유대인(혹은 유대교)의 기독교에 대한 영향의 지나친 강조, 바우어의 신약의 (지나치게 늦은)연대설정의 문제를 지적함. 그에 의하면 예수님은 도덕적으로 완전한 인간성의 원형이며, 그 안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으로 계시하시는 분이다. 기독교를 절대적인 윤리적 종교로 정의함. 환언하면, 그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초자연적인 구원이라기보다는 윤리적-도덕적 가치라고 보았다. 이처럼 자유주의자들은 예수님을 동정녀에게서 태어나, 대속적 죽음을 죽고, 육체적으로 부활하여, 승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탁월한 윤리 교사로 바꾸어 놓았다. 이처럼 성경이 말씀하는 초자연적인 요소들은 배척되고, 대신 그 자리에 가치와 사회적 책임을 이념으로 하는 나라를 옹호하는 도덕적 유대인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2.2. 하르낙(Adolf von Harnack, 1851-1930) 그의 책 ‘Wesen’(기독교의 존재, 본질- 영문판은 What is Christianity?)에서 기독교의 핵심을 하나님의 우주적인 보편적 父性과 인간의 보편적 형제됨이라는 두 가지 근본 개념으로 축소시켜버렸다. 이처럼 19세기에는 기독교를 축소주의 혹은 환원주의(reductionism)로 만들려는 시도로 몸살을 앓았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어떤 것이 종교적인 의의를 갖는지 어떻게 결정할 수 있나? 하르낙이 제시한 기준은 예수님이 동시대 사람들과 공유했던 사상들은(예. 미래적이며 영원한 나라) 버려야 할 껍데기들이다. 예수님에게 독창적인 것만이(예. 현재적이며 내재적인 나라) 알맹이다. 평가: 이 기준은 먼저 우리의 상식에도 맞지 않고(왜냐하면 예수님은 왜 그 당시의 사람들과 사상을 공유할 수 없단 말인가), 신약의 가르침에 대한 이해 부족의 결과이다. 3. 종교사학파 (school of religion history) 19세기 종교사학파는 진화론적 철학을 받아들여 모든 종교가 진화론적 발전 단계를 (정반합으로)밟는 것은 자명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모든 종교는 단순한 형태에서 복잡한 형태로 발전해 간다는 말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모든 종교는 원시적 형태인 에니미즘(animism: 자연물에 악한 영들이 거주한다고 믿음. 예. 창 3장의 뱀 속에는 사탄이 거함)에서 더 복잡한 단계인 다신론(polytheism: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볼 수 있듯이 각자 뚜렷한 역할을 하고 있는 많은 남신들과 여신들이 존재한다), 일신론(henotheism: 모든 국가와 민족은 각각 하나의 신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 따라서 국가와 민족의 수만큼 신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유일신론(monotheism: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시다)으로 발전한다. 이런 진화 개념은 종교에만 한정되지 않고 다른 학과에도 적용되었다. 한 예로, Herbert Spencer는 정치학 이론에 사회적 진화론(Social Darwinianism)을 적용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러한 사상의 뿌리에는 헤겔의 변증법적인 관념론(dialectical idealism)이 있는데, 이것은 역사는 변증법적 발전과정을 통해 스스로 완성되어 간다는 진화론적 역사관이다. 3.1. 빌리암 브레데(William Wrede, 1859-1906) ‘복음서의 메시아 비밀’이란 책에서 브레데는 마가복음이 자유주의자들이 생각했던 대로 역사적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신빙성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상 역사적 예수님을 교회가 신앙하는 그리스도와 일치시키기 위하여 고안된 마가공동체에 의해서 고안된 정교한 신학적 해석이라고 주장했다. 브레데에 의하면, 마태와 누가는 마가복음을 사용하였으나, 그들은 ‘메시아 비밀’(Messianic secret)에 대한 마가의 이론을 견지하지는 않았다. 브레데는 초대교회를 기독교 신앙의 참된 창시자로, 네 권의 복음서 모두를 철저히 인간적이고 신적인 예수님을 보여주는 철저히 신학적인 작품으로 제시했다. 反초자연주의자인 브레데는 모든 이야기가 본질적으로 비역사적이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브레데 이후의 비평에서는, 복음서들이 ‘전기’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산출하고 강화하려는 목적만을 위해 기록된 케뤼그마라고 주장하는 것이 진부한 표현처럼 되었다. 위의 주장을 평가해 보자. 여기서 우리는 역사적 예수 탐구를 주도해 온 사람들이 해왔던 것처럼 역사적 예수님과 선포된 그리스도 사이를 날카롭게 구분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초대교회가 신앙하고 예배하고 선포한 그리스도는 성육하사 이 땅에서 사역하신 예수님이시지 별개의 다른 사람이 아니다. 이 둘은 동일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 땅에서 역사적으로 혈육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사역하실 때 이미 메시아-그리스도로서 활동하셨고 그 때 이미 제자들과 큰 무리들이 바로 그 예수님을 신앙하고 고백하지 않았던가! 따라서 부활절을 기준으로 해서 이원론적으로 접근할 수 없다. 주님의 부활 이전에도 예수님은 고백된 그리스도이셨고 메시아로 활동하셨다. 물론 부활, 승천, 그리고 오순절 성령님의 강림 후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더욱 명료하게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깨닫고 믿게 되었음은 분명하지만, 비로소 부활로부터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믿게된 것은 아니다. 3.2. 빌헬름 부세트(Wilhelm Bousset, 1865-1920) 독일의 괴팅겐과 기센(Giessen)에서 가르쳤던 부세트는 신약 종교사학파의 대표격이다. 기센대학의 동료인 헤르만 궁켈과 함께 종교사학파적 접근을 시도했다. 그의 초기의 사상에서는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종말론적인 사상을 배격했으나, 나중에는 예수님의 메시아 의식에서 종말론적인 요소를 인정했다(예. 다니엘서의 인자로 자신을 생각하심). 부세트는 예루살렘 교회가 예수님을 오실 인자로 생각하였지 주님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고 주장함으로 예수님은 신앙의 대상이 아니었다고 본다. 안디옥교회와 바울이 ‘주’(퀴리오스; 구약의 ‘야훼’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라는 호칭을 예수님께 적용했다(고전 16:22; 갈 1:19). 이 부분의 복음주의적 비평을 위해서는 메이첸의 “바울 종교의 기원” 제 8장을 참고하라. 위의 주장을 평가해 보자. 일반적으로 종교사학파들은 신약 해석을 위해 헬라문화와 비교한다. 하지만 이것은 편협하고 일방적이다. 왜냐하면 신약의 배경은 구약, 유대교, 헬라-로마 문화를 아우르는 넓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바울은 길리기아 다소라는 헬라-로마 도시 출신이며, 바리새인으로서 유대교의 영향을 받았고 기독교 선교사-목회자-신학자였기에 이 3가지 세계를 다 섭렵한 사람이 아닌가? 바울 역시 그 시대의 아들이었고 성령께서 이것을 사용하셨다. 4. 20-21세기의 연구 새로운 접근으로 역사적 예수님에 대해 탐구하려는 시도가 20세기에 중반 이후에 있어왔다. 그 흐름의 연장선에서 21세기에도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1970년대 이후로 사회-과학적 비평에 의해 연구가 진행되는데 이것은 주로 역사비평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차원에서이다. 하지만 혹자는 역사비평과 사회과학적 비평을 보조적으로 사용하려는 움직임도 있다(예. A. Van Aarde). 물론 이데올로기 비평으로 인해 해석자의 이념에 의해 결정되는 상대적인 예수님의 모습이 등장하고 있다. 여성비평, 후기 식민지주의 비평, 해방신학 등등. 5. 요약 1차 역사적 예수 탐구는 舊탐구(Old Quest)로서, 1835-1836년의 David Friedrich Strauss의 ‘Das leben Jesu’가 잘 대변해 준다. 이 책에서 Strauss는 해석자는 복음서가 예수님의 언행을 채색이 되지 않은 역사적인 기록이라고 믿으면 안 되고, 예수님의 이야기를 설명할 때 복음서 기자들이 ‘신화’를 사용했음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편견이 없는 역사적 예수 연구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교회의 전통적인 교리에 의해 채색되어지지 않은 순수한 역사적 예수님을 찾으려는 첫 번째 시도였다. Strauss를 뒤이어 1860년대에 Joseph Ernest Renan이 ‘Vie de Jésus’라는 책을 썼다. 그러나 알버트 슈바이처가 간파했듯이, 이들의 철학적 전제에 의해 초자연적인 요소가 부인됨으로써 역사적인 예수님이 아니라 자신들의 사상을 반영하는 예수님을 만들어 냈다. 즉 舊탐구 연구자들은 역사적 예수님을 찾기 위해 역사의 우물 속을 들여다봤지만 결국은 우물 속에 비췬 자신의 모습만 보았을 뿐이다. 알버트 슈바이처는 1차 탐구의 마지막 주자격인데 舊탐구를 종식시켰다. 예수님은 묵시적인 사상가였기에 주님 자신의 생애 중에 혹은 사후 짧은 시간 안에 세상의 종말이 올 것을 믿었다고 슈바이처는 주장했다. 따라서 슈바이처가 볼 때 1차 탐구는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에 나타난 종말론적이며 묵시적인 면을 무시 내지 축소-간과했다는 것이다. 2차 역사적 탐구는 1960년대 주로 불트만의 우파에 의해 독일과 스위스에서 수행된 것으로 ‘新탐구’(the Second or New Quest)라 불린다. 이 新탐구라는 말은 James M. Robinson의 책 제목 ‘역사적 예수에 관한 새로운 탐구’(A new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 1959)에서 나온 것이다. 케제만, 푹스, 보른캄, 에두아르드 쉬바이처, 에두아르드 쉴레비벡스, 콘첼만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를 사이를 잇는 유일한 동질성은 신앙으로 형성된 실재뿐이라고 보았던 불트만과 달리, 이들은 교회의 그리스도 혹은 복음서의 예수님과 역사적 예수님 사이에 연속성이 있음을 주장하면서, 복음서를 역사적 예수 연구의 자료로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요아힘 예레미아스와 B. 게르할드슨은 불트만과는 달리 헬라문화가 아닌 유대문맥에서 역사적 예수 탐구를 수행했다.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에 의해 반복, 암기를 통해서 전승되었다고 본다. 이것과 관련하여,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님이 어떻게 부활하신 그리스도-주님으로 선포되었는가를 설명하려는 철학적이고도 신학적인 노력은 보통 ‘신해석학’(New Hermeneutics)이라 불린다. G. Ebeling과 E. Fuchs 등에 의해 수행된 ‘신해석학’은 한편에서의 역사적 진술과 다른 편에서의 신학적인 확언 사이에 연결점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면서 언어의 현상학을 바탕으로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신해석학은 예수님의 행위와 가르침에 대한 복음서의 기록에서 생성된 신앙의 사건과 예수님에 관한 기독교의 선포 안에서 표현된 신앙의 사건이 동일한 실체임을 인정한다. 바로 이 점에서 새로운 역사적 탐구와 신해석학은 일치한다 (참고 정태현, 1996:170). 제 3차 탐구(the Third Quest)는 1980년 초반에 시작되었는데, 고고학과 사본상의 자료와 새로운 해석 방법론의 등장, 그리고 역사적 예수탐구가 제 1차 舊탐구와제 2차 新탐구와 같이 별 볼일 없는 결과를 얻지 않을 수 있다는 신념에 의해 촉진되었다. 제 3차 역사적 예수 탐구는 엄밀한 의미에서 역사적 예수 연구에 관한 획기적인 새로운 자료의 발견에 연유하고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불트만이 허물었던 복음서에 대한 역사적인 신뢰성의 재회복과 역사적 예수님과 복음서를 헬라화의 문맥에서 보지 않고 유대교의 문맥에서 보려한 운동이다. 하지만 3차 연구의 경우에도 북미학자를 중심으로 조직된 Jesus Seminar(예수 연구회)에 의해 연구된 파괴적인 결과도 있다. 3차 탐구에서 주조된 예수님은 다양하다: (1) 예수님을 단지 헬라의 유랑 견유 철학자(미국 De Paul대학의 J. Dominic Crossan, Vernon Robins의 제자로서 수사학에 능통한 Burton Mack, F.G. Downing). (4) 급진적인 사회변혁을 외친 예언자로(Gerd Theissen, Richard A. Horsley, R. David Kaylor- 이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천국 이해는 사회-정치적이지 신학적이거나 종교적이지 않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 중 많은 부분은 갈릴리의 사회적 상황에 대한 왜곡된 재구축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예수님 당시의 이식은 종교와 사회-정치적인 면이 서로 얽힌 것이지 별도의 것은 아니었다). (5) 유대 메시야 혹은 소외된 유대인(J.P. Meier, 튀빙겐의 Peter Stuhlmacher, James D.G. Dunn, Marinus de Jonge, Markus Bockmuel, 그리고 영국 더럼의 대주교인 Nicholas T. Wright-그는 예수님이 스스로를 이스라엘 혹은 새 성전으로 보았다고 메시아의 빛 속에서 이해한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의 사역 중에서 이스라엘과 성전의 회복을 강조한다. 따라서 이런 주장은 3차 탐구의 과격한 주장을 교정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대체로 이들은 대체로 낮은 계층에 속하셨던 예수님은 소외된 자들의 친구이며 로마 제국의 변방에서 활동하신 분으로 본다). (6) 하나님의 지혜로서의 현자(Sage)로만 보는 사람(여성신학의 대표주자인 E. Schüssler Fiorenza- 쉬슬러 피오렌자는 하나님의 선지자인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가 아닌 소피아 즉 지혜로 보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유대의 가부장적인 체제를 옹호하지 않고 혁신 운동 특별히 평등주의 운동을 추구했다고 본다. 예수세미나 회원들처럼 쉬슬러 피오렌자도 Q와 도마 복음을 역사적 예수 탐구의 주요 자료로 높이 평가한다. 다른 주창자는 영국 Durham대학 출신의 미국 나사렛교단 에즈베리신학교의 Ben Witherington 3세이다. 그는 3차 탐구의 몇몇 견해를 종합하면 예수님의 모습을 더욱 완벽하게 구축할 수 있다고 본다. 그는 쉬슬러 피오렌자가 예수님을 현대 민주주의적 평등 사회에 적합한 인물로 현대화 시켜서 정치적으로 바른 평등주의자로 만들었다고 비판한다. 이들의 주장에서 도출되는 결론은 하나님은 지혜이시고, 예수님은 육신으로 오신 지혜의 구체화이시고, 성도는 지혜의 자녀라는 점이다. 하지만 우리가 볼 때 예수님을 묘사할 때 지혜는 예수라는 칭호 보다 더 직접적인 호칭이 아니다). 신탐구와 구별되는 3차 역사적 탐구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참고 Bird, 2004:7-8): 2. 예수님의 메시지는 종말론적이라는 사실에 대부분 일치한다. 예수님의 사역의 목표라 할 수 있는 하나님 나라는 평등주의적인 유토피아(an egalitarian utopia)가 아니라 유대묵시적 경험이라는 모체를 통해서 이해해야 한다. 이것을 평가해 보자.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의 단편만을 본 결과물이다. 단편을 가지고 전체를 그리려는 시도에 불과하다. 모든 구절에 이런 단편적인 결론이 적용될 수 없다. 물론 단편적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수용할 수 없는 주장도 있다. 우리가 전통적으로 고백하듯이 역사적인 예수님은 구약으로부터 약속된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이요, 완전한 사람이었음을 부인할 만한 이유가 전혀 없다(마 16:16). 비슷한 현상이 (역사적인) 바울의 연구에서도 나타난다(참고. Ben Witherington 3. The Paul Quest. Carlisle : Paternoster). 하지만 3차 탐구는 예수님에 관한 더 많은 자료와 새로운 방법론을 적용하여 1-2차 탐구보다는 더욱 더 예수님을 1세기의 구체적이며 신뢰할 만한 역사적-사회적 상황 안에 위치시킨 것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3차 연구의 약점 중 하나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승천을 거의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결론 도출을 위해 세밀한 본문 주석이 부족하다는 점과 때때로 외경을 과대 의존한 점도 지적할 수 있겠다. 하지만 예수님에 대한 역사적인 탐구가 필요한 이유조차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역사적인 종교이며 필연적으로 역사적 탐구에 개방적인 면을 가지고 있는데, 만일 이것을 포기하면 무역사적 혹은 가현론 적 기독론(docetic Christology)에 빠진다. 6. 역사적 예수탐구의 결론 역사적 예수님을 찾으려는 시도들은 대부분 탐구자의 전제와 신학에 의해 변질되고 불완전한 예수님의 모습을 만들고 말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나사렛의 역사적 예수님에 대한 편향된 강조는 하늘 보좌에서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약화시켜 버린 결과를 초래했다. 복음서가 가르치는 대로, 우리는 역사적 예수님(historical Jesus)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신분을 변화시켜 버리신 ‘획기적인 예수님’(historic Jesus)을 믿어야 한다. 따라서 복음이 무엇인지 바로 깨달아야 하되, 예수님의 사역(works)뿐 아니라 인격 (person)중심으로 성경을 이해해야 한다. 역사적 예수탐구는 교의학적인 기독론과 더불어 연구될 수 있겠다. 포쳅스트룸의 Viljoen교수가 지적한 대로 분명한 것은 성경에 묘사된 지상의 예수님의 삶을 복음서에 나타난 것처럼 메시아로 선포된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과 완전히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선포된 그리스도는 또한 구속사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는 1-3차 역사적 탐구의 결과, 특별히 역사비평을 통해 왜곡되게 도출된 예수님의 모습과 2000년 전의 예수님(그리고 이와 연속선상에 있는 고백되고 선포된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모습을 구분해야 만 한다. 역사적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에 기독교 신앙이 기초해야 한다면, 이 주제와 관련된 학자들의 우왕좌왕하는 놀음에 기초할 수 없는 것이 더욱 분명해 진다. 7. 예수님 말씀의 진정성 (친저성)의 기준(Criteria of authenticity) ‘역사적 예수’ 탐구는 방법면에서 진정성의 기준, 곧 공관복음의 말씀이 예수님에게까지 소급될 수 있느냐 아니면 초대교회에까지만 올라가는 것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에 관한 문제와 관련된다. 진정성의 3가지 기준과 비평을 간략히 살펴보자: (1) 차이의 기준: 진정성을 가지는 예수님의 말씀은 유대교와 초대교회의 가르침과 틀려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이 근본적으로 유대교와 초대교회와의 불연속성에 있어야만 진정성이 인정된다는 것은 그리 설득력 있지 못하다. 예수님은 유대교를 잘 알고 계셨고 구약을 인용 및 해석하셨고, 초대교회는 예수님과 연속선상에 있었음을 부인 할 수 없다. (2) 다중 증언의 기준: 같은 주제가 다른 곳에서 같은 형태로 또는 덧붙여진 형태로 반복되는 것은 진정성의 기준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소외된 계층에 대한 관심은 다양한 문학 양식 속에 여러 번 등장한다. 하지만 한 번만 등장하는 구절과 내용 역시 예수님의 말씀으로 보지 않을 이유가 없다. 누가복음에서는 다른 복음서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약 40%의 독자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지 않은가? (3) 연관성 (일관성)의 기준: 진정성으로 인정받기 위해 주어진 말씀은 반드시 다른 기존의 자료와 양식과 내용에 있어서 연관되어야 한다. 우화는 예수님의 비유와 양식면에서 연관성이 없기에 진정한 예수님의 말씀에서 배제되거나 의심되어야 한다. 하지만 다른 기존 자료의 양식과 내용이 과연 예수님의 말씀의 진정성을 보장하는가? 참고로 혹자는 진정성의 비판 기준들은 예수님의 행위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위의 기준들에 비추어 보면 율법사와 바리새인의 분노를 자아냈던 세리와 죄인에게 보여주었던 예수님의 개방적인 태도 등은 그 진정성을 의심할 여지가 거의 없다. 하지만 위에서 지적했다시피 이 세 가지 기준은 모두 언제나 엄격히 적용될 수 없다 (참고 정태현, 1996:253-254). 8. 신약 기독론의 근본인 ‘예수님의 인격’(person/personality). 가장 두드러진 예수님의 인격은 그분의 ‘全 교회적 인격’(whole Church person)이다. 이 全 교회적 인격을 오랫동안 ‘집단적 인격’ (corporate personality)이라고 불러왔다. 구약에서부터 한 개인 남자는 그 자신을 너머 그에게 속한 사람들을 포함하는 존재로 여겨졌다. 가정에서의 남편 그리고 국가 차원에서의 왕은 각각 가정과 국가의 모든 사람들을 집합적으로 포함하는 인격을 가졌다. 이것은 은유가 아니라 존재론적인 확언(ontological affirmation)인데, 성경의 기자들의 실재에 대한 개념은 이 개념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집단적이면서도 개별적이다. 예수님과 신약 저자들에게 있어서 인간이 집단적이라는 개념은 올바른 성경이해를 위해 결정적인 요소이다. 창 2:24에 나타난 성적인 연합 즉 ‘둘이 하나가 될 것이라’는 말씀은 집단적 인성의 기본 단계에서 전형적인 예라 할 수 있다. 기본 단계를 너머, 국가적 혹은 언약적인 단계에서 볼 때, ‘아브라함 안에서’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의 ‘모세 안에서’ 혹은 ‘모세의 집’ 혹은 ‘다윗의 장막’과 같은 용어에서 집합적 인성이 설명된다. 더 넓게 본다면 인류 전체는 ‘아담 안에서’의 존재로 설명된다. 이런 집합성 (corporeity)의 각각 단계는 기독론적인 적용성을 가진다. 마치 남자와 여자가 성적으로 연합하듯이, 교회는 믿음의 관계로 예수님과 연합하게 된다. 새 언약의 집합성을 설명하기 위해 예수님과 바울은 다양한 이미지들을 사용했다. 마지막 만찬 석상에서 그리고 가버나움의 한 회당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새 언약을 위한 유월절 양 그리고 그의 제자들이 먹어야 할 새로운 출애굽의 만나로 설명하신다(마 26:27 이하; 요 6:35, 49-56). 비슷하게 바울은 교회가 출애굽하는 것을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혹은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으로 설명한다(고전 10:16 이하). 이런 이미지들과 긴밀히 연관된 것들은 집, 성전, 혹은 텐트와 관련된 것들인데 예수님의 인격의 개별적인 차원과 집합적인 차원 사이의 상호작용을 반영한다. 복음서에서 하나님의 (새로운)성전 혹은 모퉁이 돌은 예수님 즉 주님의 개별적인 육체 (individual body)라고 말씀한다(마 21:42; 행 4:11; 시 118:22). 이런 이미지들은 때때로 ‘아담 안에서’ 와 ‘그리스도 안에서’를 대조하려는 의도도 가진다. 즉 창조와 재창조 사이의 대조를 의도한다(히 9:11; 벧후 1:13 이하). 집단적 아담과 집단적 예수님 사이의 대조는 바울의 다음과 같은 용어 사이의 대조를 위한 근간이 된다: 옛 사람- 새 사람, 겉 사람-속 사람, 자연적인 몸-영적인 몸. 갈 3:16의 ‘아브라함의 씨’도 개별적인 동시에 (예수님)집합적인 (모든 성도)특성을 가진다. 이스라엘 국가가 한 명의 왕에게 연합되어 있듯이, 새 이스라엘은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예수님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집단적인 인성이란 개념은 3위 하나님의 속성도 특징 지운다. 즉 하나님의(위격의) 복수성 안의 통일성을 의미한다. 환언하면, 신약 저자들의 집합적인 인성의 개념은 집합적 인성으로서의 하나님 자신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신약 저자들의 확신 즉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하나님과 독특한 통일성의 관계를 가진다는 사실은 나중에 삼위일체의 교리로 확립되었다. 이 확신의 기원은 어느 정도 예수님의 지상 사역에서 기인하는데 복잡하다. 구약과 기독교 이전의 유대교에서 이미 하나님은 다양한 현시(plural manifestations)를 가지는 분으로 인식되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영과 천사로부터 동일시되기도 했지만 구분되기도 했다. 주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메시아)로서의 왕은 신적 성품(divine person)의 잠재적인 연장(potent extension)을 대표했다. 이후의 구약과 신구약 중간기 유대주의에서는, 하나님의 말씀(logos; 사 9:8; 55:10 이하; 지혜서 18:15) 혹은 하나님이 지혜(sophia; 지혜서 7:21-27; 시락 23:3; 잠 8:22 이하)와 같은 특정한 하나님의 특성들은 비슷한 방식으로 여겨졌고 사용되었다. 몇 가지 예를 살펴 볼 때, 이런 용례는 특정한 신적인 특성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행위를 시적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다른 예들을 살펴볼 때, 이런 용례는 하나님 자심과 구분되는 하나님 자신의 존재의 본질을 나타낸다. 이런 구약과 유대교의 집합적인 인성 개념과 참 이스라엘을 구원하신다는 메시아적 소망의 배경 하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현시가 예수님 한 분 안에서 작용함을 알았다. 주로 부활 사건과 오순절 이후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온전히 하나님으로 고백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신약 저자들은 주로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의 일치를 설명할 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마 11:27), 성령(고후 3:16), 혹은 형상과 지혜(고후 4:4; 골 1:15; 고전 1:24; 눅 11:49)로 밝히거나, 아니면 원래는 하나님을 언급하는 성경 구절을 예수님 자신에게 적용하기도 한다(롬 10:13=요엘 3:5; 고후 3:16 이하=출 34:34; 엡 4:8=시 68:19; 히 1:6=시 97:7; 히 1:10=시 102:25). 신약 저자들은 이런 해석을 분명히 혹은 암시적으로 행했는데 이것을 통해서 예수님의 신적 성품은 바로 하나님의 성품임을 강조했다. 1세기와 2세기의 유대교에서의 성경의 인용은 신론에 관해 분수령을 이루었다. 그 때 구약과 초기 유대교의 부정확한 일신론의 개념을 두 개의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돌려버렸다. 한편으로는, 집단적 인성 개념과 기독론적 해석을 통해서 유대인- 기독교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후대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적 유일신론을 형성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랍비 저자들은 그들의 하나님의 통일성에 대한 주석적 강조로 인해 탈무드적인 유대교의 유니테리언파적 일신론(unitarian monotheism)을 만들었다. 예수님의 전 교회적 인성 혹은 집합적 인성을 통해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교회가 예수님과 연합되어 있어서 주님과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고, 함께 하늘에 앉혔다는 존재론적인 사실(엡 2:1-6)과 예수님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히 1:2) 우리도 지금 여기서 누릴 수 있다는 복이다. 문제는 우리 마음의 눈이 밝아져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통해서 여기서 깨닫고 누리는가 아니면 그림의 떡처럼 그냥 바라보고 죽어서 깨달을 것인가이다. 예수님의 온 교회적-집단적 인격에 대해 자세한 것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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