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만이 참으로 있는 것
사랑만이 참으로 있는 것
지나가버린 순간을 되찾으려한들 소용이 없다.
지나간 시간은 다만 하나의 기억일 뿐, 그것은 '살아있는 지금'은 아니다.
<지금>이란 <생생히 싱싱하게 살아 있음>이요, '그것'은 그대로 영원이다.
사람은 '그것'을 모양으로 그리지 못한다.
사람의 마음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다만 '그것'이 있음을 알 뿐이다.
'그것'이 다시 올 것을 상상하고 기다리는 것은
'내일'이 다시 오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
'그것'은 두 번 오는 것이 아니다.
'내일'은 언제나 '내일'이지 않은가!
'되자'고 하는 것은,
한결같이 여기에 지금 이미 있는 것을 어딘가 다른 곳에서 찾아 헤매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그것'을 몸소 드러내 보일 수 있을 턱이 없다.
'그것'은 '그것'을 사는 것으로써 체험될 뿐이다.
'그것'으로 '지금' 되어버려야 한다.
한결같이 이미 있는 것 속에서 순간순간을 온전히 살면 된다.
'사랑'-이것만이 실재다-을 실지로 나타냄으로써 순간순간 '그것'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 순간순간에는 이미 옳음(正)도 없고 그름(邪)도 없으며,
선(善)도 없고 악(惡)도 없으며,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으며,
오직 영원한 '지금'이 있을 뿐이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니 그 중간에 끼어들어
장애가 되는 '나'는 녹여 없애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참'이 참으로 나타난다.
'나는 생명이요, 사랑이다.
사랑만이 참으로 있는 것'이다.
이웃을 나 스스로처럼 사랑하려면
이웃사람 안에 있는 나의 참 나를 사랑해야 하는 것,
참 있음에는 나와 남의 분리가 없다.
-[티벳의 성자를 찾아서], 맥도널드 베인, 박영철 옮김, 정신세계사.p122~123.
(산속에 숨어있는 은둔자들은 어떤가요, 그들은 진리를 찾은 분들인가요?)
이사람아, 그렇지 않아. 산속이나 바닷가에서 칩거하고 인삼을 먹거나 온종일 배꼽에 정신을 집중한다고 해서 '참'이 깨달아지는 것은 아니야. 또 세상에서 떨어져 있다고 해서 알아지는 것도 아니야.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세상이니까. 홀로 있음이란 없는 것이야. 그것은 그저 마음 속에서 지어낸 것, 커다란 환영일 뿐이라네. 그런 허위를 깨닫게 하려고 자네를 예까지 오게 한 것이야. 그래야 비로소 '참인 것'을 알지. 누구나 자기 스스로 허위를 알게 되지 않고는 남이 알게 해 줄 수는 결코 없지. 나도 못해. 자네는 오랫동안 틈틈이 밀교 공부를 해 왔지. 그러니까 더욱 나는 자네가 '참인 것'을 철저하게 깨닫고 해탈해 주기를 바란다네.
깨달음은 단순한 명상이나 암시에 의한 신앙이나 어떤 신비한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또 미래나 과거에서 얻어질 수도 없다. 왜냐하면 과거는 기억이고, 미래는 공포가 섞인 희망에 불과하니까. 그런 것은 모조리 마음이 지어내는 것일 뿐이다. 진리는 마음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럼 어찌하면 진리에 이를 수 있을까요?)
나로서는 다만 진리에 이르는 데 방해가 되는 미로를 알려줄 수 있을 뿐이다. 그것들을 샅샅이 알았을 때 진리는 너 자신에게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래야만 비로소 진리가 정말로 내것이 되며 남의 것이 되지 않는다. 남의 것을 따라가본들 그것은 흉내에 불과하다.
또한 단순한 분석으로 진리가 깨달아지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다만 과거를 들추어보는 것 뿐이다. 해탈을 이루어주는 진리는 과거에 속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순한 분석의 과정이 거짓의 과정임을 알면 너는 그것을 놓아버리게 되고, 그러면 그것은 다른 거짓 과정들 모두처럼 너의 마음에서 떨어져 나갈 것이다.
너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은 모두 죽은 것 뿐이다. 그것은 살아있지를 않아. 진리는 모든 순간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이다. 진리는 발견되어질 것이지 단순히 믿어야 할 것이 아니며 인용할 것도 아니며 마음에서 만들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싱싱하게 살아서 행동하는 것, 싱싱하게 지금 살아 있는 것, 그것이 진리이다. '나'의 생명 그것, 생명의 모든 순간순간을 사는 것, 그것이 진리이다. 이것을 알려면 모든 거짓에서 벗어나 마음을 사랑으로 가득 채우면서 스스로 경계하고 스스로 깨어 있어야 해.
대개의 사람들이 생생하게 살고 있으려고는 아니 하고 누워서 새상을 피하고 문제에 부딪치려고 하지 않는다. 어린아이처럼 어머니 치마폭에 싸여 비바람을 피하려고만 한다. 대체 비바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결국 인간관계가 아닌가? 우리는 순간순간마다 그 관계를 의식해야 해. 만약 내가 그대를 물건을 다루듯 한다면 우리 두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러나 서로 이해할 때 비로소 참된 관계가 생긴다. 그 때 비로소 자유가 있을 수 있고 자유 안에서만 진리는 계시된다.
만약 네가 나는 사랑하지만 다른 사람은 싫어한다 할 때 너는 진리를 안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내게는 친절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불친절하다면 너를 친절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야말로 모순이 아닌가?
(이런 말은 지금까지 들어보질 못했습니다.)
못했겠지. 그것은 네가 자기 자신과 자기의 상념, 동기, 감정, 소원과 그것들이 생기는 원인과 방식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작은 나'(小我)에서 나오는 것을 모두 제거해야 비로소 진리가 참으로 알아지는 법, 진리가 자기 안에서 꽃피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바로 그런 거짓된 것이다. 너의 행위가 진리와 모순될 때 어찌 진리를 말 할 수 있겠는가.
(대사는 더더욱 엄숙하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만약 자기의 체험이라는 것이나 자기 마음 속에 있는 것으로 지배된다면 그대는 '나'의 마음을 넘어서 있는 것을 나타낼 수 없다. 다만 '나'의 마음 속에 있는 것밖에는 표현하지 못한다. '나'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은 본래 참이 아니다. 그러나 너의 행위가 이웃을 자기처럼 사랑하기 때문에 나온다면 너는 진리를 나타낼 수 있게 될 것이다.
(잠시 말을 끊으시더니 아주 인자한 목소리로 조용히 말씀하셨다.)
내 아들아, 내가 너를 꾸짖는다고 생각하는가? 아니야, 너에 대한 나의 사랑은 나 자신에 대한 사랑보다 크다. 네가 알고 있는 진리라는 것이 네가 본 것, 네가 들은 것, 네가 읽은 것으로 조립된 것이라면 그것은 그저 빈 껍질임을 너는 이제 깨달았다. '참인 것'을 발견하려면 제 마음 속을 뒤져 거짓인 것을 끌어내야 해. 네가 '나'라는 그것의 마음 속에서 쥐고 있는 것은 모두 참이 아니다. 그것은 네가 한낱 축음기로써 레코드를 이것저것 바꾸어 틀고 있는 것 뿐이다. 너 자신이 그저 남의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스스로 음악가이면서 동시에 음악인이어야 해.
내 아들아, 자아의 마음이 남이 생각하는 것과 밖에 있는 그 무엇들에 반응하여 만들어낸 것을 똑똑히 가려내야 한다. 그것은 송장이야. 부술 수도 구부릴 수도 없는 살아있는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야. 살아있는 '참인 것'은 자아의 마음으로 끌어모을 수는 없는 것......
(거기까지 말을 이으시고는 대사는 완전한 침묵 속으로 드셨다. 나도 말없이 고요 속에 빠져들었다.)
위 책, p.136~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