深耕細作/마음을 통하여 세상을

니고데모를 위하여

비오동 2009. 9. 11. 13:51

  

 니고데모를 위하여

 

 

 

   권력과 부와 명예, 그 모든 것을 다 지닌 사람도 그럴수록 신앙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성경 속의 니고데모, 그도 그런 이다. 예수와 유대인들 그리고 빌라도가 엮어내는 예수의 드라마틱한 일생 속에 그는 거의 드러나지 않게 숨겨져 있는 존재이지만 그는 볼수록 관심을 끄는 존재다.   

   니고데모는 성경 속에 모두 세 번 등장하는데, 그 세 번의 기회에서 보여 준 그의 모습은 사뭇 다르다. 그는 처음에 신중하고 의구심이 많은 바리새인이었으나, 두 번째는 예수의 심정적 지지자였으며, 세 번째는 예수의 시신을 수습한 '숨은 제자'였다. 

   이런 윤곽을 놓고 보면 그는 마음바탕이 오늘의 우리와도 그다지 다르지 않은 사람이다. 지금 우리가 그 시대로 옮아가서 니고데모와 같은 처지에 놓인다면 그 시대, 그 사태에 대처하는 것이 니고데모와 얼마나 달랐을까. 니고데모의 심리와 행적을 살펴 보면, 그로부터 우리 신앙의 과정과 한계를 비추어 볼 수도 있겠으며, 또한 그 한계를 넘어서 참된 신앙으로 나아가는 길도 엿보게 될 듯하다.    

 

   어느 날, 바리새인 한 사람이 밤을 틈타 예수를 찾아온다. 그가 니고데모였다. 그는 예수와 독대하면서 <거듭남>에 대해 묻는데, 이 첫만남은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어느날 밤에 예수를 찾아와서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고서야 누가 선생님처럼 그런 기적들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정말 잘들어 두어라.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하고 말씀하셨다.

   니고데모는 "다 자란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 갔다가 나올 수야 없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며 영에서 나온 것은 영이다. 새로 나야 된다는 내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바람은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듣고도 어디서 불어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누구든지 이와 마찬가지다."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시자

   니고데모는 다시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의 이름난 선생이면서 이런 것들을 모르느냐? 정말 잘 들어 두어라.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말하고, 우리의 눈으로 본 것을 증언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너희는 내가 이 세상일을 말하는데도 믿지 않으면서 어떻게 하늘의 일을 두고 하는 말을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 온 사람의 아들 외에는 아무도 하늘에 올라 간 일이 없다. 구리뱀이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 높이 들렸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그를 믿는 사람은 죄인으로 판결받지 않으나 믿지 않은 사람은 이미 죄인으로 판결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의 행실이 악하여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 이것이 벌써 죄인으로 판결받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과연 악한일을 일삼는 자는 누구나 자기 죄상이 드러날까 봐 빛을 미워하고 멀리한다. 그러나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은 빛이 있는 데로 나아간다. 그리하여 그가 한 일은 모두 하느님의 뜻을 따라 한 일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한다."                                                  (A.D.27년,요3:1-10)

 

    니고데모가 남몰래 밤을 틈타 온 데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다. 그는 공식적으로는 바리새인이자 유대인의 관원으로 산헤드린 공회원(요7:50)이었으며, 또한 사회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지도자이자 교사(선생)요, 막대한 부자(요19:39)였던 인물이다. 니고데모라는 이름의 말뜻조차 '백성의 정복자'였으니 명실공히 당시의 전형적인 유력자였다. 이러한 그가 예수를 대낮에 버젓이 찾았다면, 그것은 요즘으로 치면 신문에 나거나 감찰 대상이 될 일이었다. 왜냐하면 예수는 당시 유대의 지배계층이 볼 때는 '불온한 자, 저주받은 자'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예수또한 그의 요청에 호응하여, 제자들과 함께하지 않은 채 홀로 니고데모를 만나고 있다. 어쨌든 은밀하고도 위험한 만남이었다. 

   그럼에도 니고데모가 기어이 예수를 찾은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그의 절박함은 종교적인 의구심 때문이었다. 그는 매우 분별력 있는 사람이었다. 그로 인하여 높은 학식과 명예와 부와 권력을 누렸으니 아쉬울 게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그는 남다른 분별력이 있었기에 세속적 삶에 안주하지도 않은 사람이었다. 예수를 찾은 것은 그가 제아무리 높은 학식과 명예와 부를 누린다 할지라도 그것이 인생의 궁극적 문제, 곧 죽음이나 중생 및 구원의 문제, 진리에 대한 목마름을 해소해 줄 수는 없다는 것을 분별하였기 때문이리라. 무릇 분별력은 결국 자신의 무지함을 깨닫게 하며, 자신의 무지함을 알게 되면 진리에 대한 갈구가 커지고, 진리에 대한 갈구는 또한 의구심도 커지게 되는 법이다. 유대교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관습적인 신앙생활은 이제 더는 그의 종교적 열정을 불러일으키지 못할 뿐 아니라 의구심만 키웠다.  예수가 등장하면서 그의 마음은 크게 흔들렸다. 예수의 기적과 가르침을 접하자,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겠지만, 참과 거짓을 분별하려는 그의 눈과 귀는 더욱 예민해져갔다. 그래서 그는 줄곧 예수의 행적을 살피며 그가 어떤 분인지를 알고 싶어졌다. 니고데모는 결국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예수를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를 만난 니고데모는 이렇게 운을 떼었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고서야 누가 선생님처럼 그런 기적들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라며 예수에 대한 존경을 표현하고, 예수의 기적이 하느님의 존재와 권능으로 가능하였음을 인정하였다. 의례적인 언사에 가까웠으나, 그것은 예수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한 도입이었다. 그는 예수가 진정한 메시아인지를 분별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니고데모는 예수를 <기적>을 행하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 왜냐하면 메시아만이 <기적>을 행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예수가 <기적을 행한다는 것은 바리새인들에게도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들은 신앙을 오로지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이 섬기는 제사장들도 <기적>을 행할 수는 없었다. 기적이란 <모세>와 같은 메시아만이 행할 수 있는 것이니, 예수가 <기적>을 행한 것은 그가 하느님이 보낸 자, 메시아라는 증좌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이를 속임수로 치부하려 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보기에 예수는 자주 율법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였으니 그는 율법조차 모르는 자이며, 또한 성서에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리에서 메시아가 난다는 기록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그는 사기꾼이지 결코 메시아일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구심이 많고 분별력 있는 니고데모는 도리어 바리새인들과 제사장의 태도가 논리적으로 타당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그는 <기적>을 행하는 자, 예수를 직접 만나서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 판단하고자 했다.

 

   예수도 그가 찾아온 의중을 헤아리며 그에 호응하였다.   

   "정말 잘들어 두어라.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니고데모가 <기적>을 행하는 자, 예수의 정체를 파악하고자 하지만, 예수는 처음부터 초점을 바꾸었다. <기적> 대신에 <거듭남(새로 남)>을 화제로 삼은 것이다. 예수가 화제를 낸 뜻은 무엇일까. 내가 행하는 모든 <기적>은 궁극적으로 <새로 남>에 귀착된다. 그리고 또한 그것은 <하느님의 나라>를 보이기 위함이다. 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아직 그 뜻을 알아듣지 못한다. 그는 즉각 의구심을 드러내어 예수를 시험하듯 묻는다. 

   "다 자란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 갔다가 나올 수야 없지 않습니까."

   그는 <거듭남>이 대체 어떤 것인지를 모르고서 묻는 말이다. 그러나 니고데모의 말에는 예수를 시험하는 기미가 였보인다. 그의 가르침이 상식에 비추어 납득할 수 없는 일이라고 비아냥대는 투다. <다 자란 사람>이란 장성한 사람이니 생물학적으로 거듭나려면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 갔다가 나>와야 하지 않으냐라는 식이다. 그러나 이것이 니고데모의 한계이다. 그는 예수의 <거듭남>을 그저 <기적>의 한 가지 정도로만 이해하려 한다. 생각의 차원을 바꾸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성경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자만심이 강한 사람들이다. 제사장들이 종교적 전통을 바탕으로 권위를 유지한다면 관료 계층인 그들은 능력을 바탕으로 권위를 유지하였다.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철저히 준수한 것도 당시 사회에서는 능력이요 일종의 현실적 수단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그들에게 <율법>이란 곧 일종의 <지식같은 것>이었다. 그들이 율법을 남보다 잘 알고 더 잘 준수함으로써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신이 신앙에 충실하다고 자부할 수 있었고, 또한 그들이 남들에 대하여 차별적인 권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바리새인들은 예수와 그 제자들에 대하여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진리를 인식할 능력이 없고, 율법을 통달하고 있는 자기들에게 잘못된 인식이나 행위가 있을 수 없다고 고집하였다. 나아가 그들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저주를 받을 자'로 규정하며 업신여겼으며 사람들이 예수에게 속고 있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하여 아랫사람들에 대해서도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예수를 믿는 자가 있다면 그가 누군지 말해 보아라."라고 추궁하였다. 

   이러한 모습을 통해 볼 때 결국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현실적인 수단으로 취하는 데 그쳤을 뿐, 그것이 진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알지 못했던 사람들이다. 생각이 형식적인 차원(율법 지식)에 머물렀으므로 다른 차원(신앙의 본질-거듭남의 비밀)을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 순간의 니고데모도 보통 바리새인의 한 사람이었다. 예수는 바리새인들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기에 "정말 잘 들어 두어라."라고 거듭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예수가 그를 만난 까닭은, 장차 모든 바리새인들에게도 거듭남의 비밀을 밝혀 널리 깨우쳐야 했기 때문이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

   예수는 <거듭남>이란 곧 물과 성령으로 새로나는 것이라 말한다. 이어서 육으로 난 사람인 너는 그 비밀을 알 수 없다. 다만 영으로 거듭 난 사람만이 그 비밀을 알 수 있다. 바람의 비밀처럼 눈으로 확인할 수 없듯이 성령으로 난 사람도 그와 같다. 라고 예수는 답한 것이다.  

   이러한 대답에는 물론 예수는 자신이 물과 성령으로 새로난 사람임을 전제로 한다. 예수는 두 번 났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리아의 몸에서 났으며,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아 거듭났다. 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리아의 몸에서 났다는 것은 사실로서 의심스러운 바가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예수가 말하는 거듭남이란 바로 세례를 말함이다. 즉 태어남에 이은 거듭남인데, 태어남이 육으로 남이라면 그에 이어서 성령으로 세례받음이 진정 성령에 의한 거듭남이다.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에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와 머물렀다. 그로서 예수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으로 거듭났으며, 그리하여 세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사람, 영으로 거듭 난 사람이 되었다. 이와 함께 원죄와 무지와 관습의 굴레는 깨끗이 씻겨나고,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알게 되고 그에 따라 새로이 살게 되었다. 사람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난 것이다. 바로 이것이 거듭남의 본질이다. 예수의 공생애는 이렇게 하여 시작된다. 성경에 예수의 세례 이전 행적이 자세하지 않은 것은 예수의 거듭남과 공생애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세례 이전의 행적들을 함께 밝히면 예수의 거룩함은 흐려지고 만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성령으로 거듭남이 어떠한 이치인지는 육으로 나온 사람이 알 수 없는 바이다. 그것은 마치 바람과 같은 것이어서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예수의 말을 대변하자면, 곧 '육으로 났으되 세속적 삶에 묻혀 거듭나지 못한 너의 상식으로는 영으로 거듭남을 헤아리지 말라.'라는 말이었다.  

   거듭남도 일종의 기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병이어>나 <물 위로 걷기>라거나, <죽은 사람을 되살리기> 같은 기적과는 다르다. 차원이 다른 것이다. 일반적인 기적은 내적인 원인으로 해서 외적 현상이 되어 나타나는 것이지만, 거듭남은 외적 현상으로 나타나기보다 내적 변화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물과 성령이 가져오는 인간의 내적 변화이기 때문이다. 니고데모는 이런 이치를 알지 못하고 있다. 니고네모에게 <기적>이란 외적인 변화이다. 그러나 예수가 말하는 <거듭남>이란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진정한 기적이며, 그것은 육으로 나타나는 변화가 아니라 영의 변화이다. 

 

   니고데모는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또다시 묻는다. 우리도 이 시대의 답답한 니고데모들이다. 천지창조로부터 부활에 이르기까지 성경 속의 많은 기적들을 듣지만, 기실 우리는 그것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한다. 그러니 그 속에 담긴 진정한 뜻도 헤아릴 수 없지 않은가.

   이에 다시 예수는 답변한다. 예수의 답변이 다소 장황해졌다. 니고데모가 알아들을 수 없어 하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것은 성경을 기록한 기자들의 탓이었을까. 그렇지만 핵심은 분명히 드러난다. 다음과 같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그를 믿는 사람은 죄인으로 판결받지 않으나 믿지 않은 사람은 이미 죄인으로 판결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의 행실이 악하여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 그러나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은 빛이 있는 데로 나아간다. 그리하여 그가 한 일은 모두 하느님의 뜻을 따라 한 일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한다."

 

   예수의 핵심은 이러하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여 외아들을 보내 주셨다. (그가 바로 나이다.) 그리하여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 그가 한 일은 모두 하느님의 뜻을 따라 한 것이다.> 이를 더 축약하면 <하느님의 아들 (나)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구원을 얻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리라.>이다.

   그러나 니고데모를 위하여 두 사람의 대화를 더 찬찬히 재구성해 보자. 의구심 많은 세속 사람 니고데모는 다시 묻는다. <그(당신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인 것을 (나같은 사람이)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예수는 말한다.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은 빛이 있는 데로 나아간다.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며, 또 본 것이다.> 그래도 니고데모는 다시 묻는다. <어떻게 알고, 또 보았습니까?> 예수는 <새로 남(세례, 성령체험으로 거듭남)을 통해서다.>라고 답한다. <그러나 이는 결국 성령을 체험하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 아닙니까?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예수는 마지막으로 답한다.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이 한 일은 모두 하느님의 뜻을 따라 한 일이라는 것을 드러나게 한다.> 예수의 말씀이 여기에 이르자, 니고데모는 더는 묻지 못한다.

   이쯤에서 니고데모는 어찌해야 했을까? 결단을 해야만 했을까. 끝내 예수의 말을 부정을 하든지, 아니면 예수의 제자가 되기를 청하여 새로운 삶을 살기를 결단하든지. 그는 고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어느 것도 결단하지 못했다. 이 순간 그는 우유부단한 한 사람의 철학자였다. 이러한 그이기에 예수 또한 그에게 따르라고 말하지 않는다. 신앙의 결단은 바로 누구나 그 자신만의 몫이기 때문이다.

   성서는 이후의 사실에 대하여 추기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는 이쯤에서 말없이 돌아갔을 것이다. 그는 평안하였을까? 어쨌든 그의 마음은 신앙의 신비와 격심한 고뇌가 갈수록 깊이 교차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예수의 말씀대로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이 한 일이 모두 하느님의 뜻을 따라 한 일이라는 것을 드러나게 할> 때를 기다리며, 그때까지, 즉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기까지 예수를 숨어서 지켜보아야만 했을까. 

 

   이후로 한 동안이 지나서 유다인들이 예수를 붙잡으려 할 때, 니고데모는 두번째로 성경에 모습을 나타낸다. 예수를 잡아오라 하였으나 아랫사람들이 그를 잡아오기는커녕 도리어 감화를 받고 왔다. 그 순간 대제사장과 공회의 바리새인들이 이들을 질타하는데, 이 때에 니고데모는 그들 앞에서 정당한 절차도 없이 예수를 죄인으로 몰아간다고 그들을 비판한다. 

 

   성전 경비병들이 그대로 돌아 온 것을 보고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어찌하여 그를 잡아 오지 않았느냐?" 하고 물었다. 경비병들은 "저희는 이제까지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이 말을 들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너희마저 속아 넘어갔느냐? 우리 지도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 중에 단 한 사람이라도 그를 믿는 사람을 보았느냐? 도대체 율법도 모르는 이 따위 무리는 저주받을 족속이다." 하고 말하였다.

   그 자리에는 전에 예수를 찾아 왔던 니고데모도 끼어 있었는데 그는 "도대체 우리 율법에 먼저 그 사람의 말을 들어 보거나 그가 한 일을 알아보지도 않고 죄인으로 단정하는 법이 어디 있소?" 하고 한 마디 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당신도 갈릴래아 사람이란 말이오? 성서를 샅샅이 뒤져 보시오. 갈릴래아에서 예언자가 나온다는 말은 없소.”하고 핀잔을 주었다.(요7:46-52)

 

   니고데모는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이 그토록 존중하고 거룩하게 여기는 바로 그 율법에 어긋났다고 항의하였다. 이같은 비판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니고데모 자신이 바로 율법에 통달하고 있는 바리새인이었기 때문이다. 그 행동이 비록 소극적이지만 그 상황의 형세를 고려할 때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가 예수를 마음 깊이 존경하거나 옳은 이라고 여기지 않았다면 가능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세번째 등장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후에 이루어진다. 끝내 그는 스스로 예수의 시신을 수습하는 자가 되어 예수를 따르는 자가 된 것이다. 

 

   그 뒤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이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 가게하여 달라고 청하였다. 그도 예수의 제자였지만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그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 빌라도의 허락을 받아 요셉은 가서 예수의 시체를 내렸다. 그리고 언젠가 밤에 예수를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침향을 섞은 몰약을 백 근 쯤 가지고 왔다. 이 두 사람은 예수의 시체를 모셔다가 유다인들의 장례풍속대로 향료를 바르고 고운 베로 감았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는 동산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아직 장사 지낸일이 없는 새 무덤이 하나 있었다. 그 날은 유다인들이 명절을 준비하는 날인데다가 그 무덤이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를 거기에 모셨다.(요19:  40)

 

   예수의 시신을 수습하는 자들이 예수의 제자들 중 어느 누구가 아니라 당국자와 참 바리새인으로서 '예수의 숨은 제자'인 사람들이라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니고데모가 이 일을 회피하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스스로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1백리트라 쯤 가지고 와서 예수의 시신을 수습하였다. 그리고 "예수의 시체를 모셔다가 유다인들의 장례풍속대로 향료를 바르고 고운 베로 감았다."(요19:40) 이는 우연이나 충동적인 행위가 아니었다. 그는 중대한 결단을 했던 것이다. 이로써 그는 예수를 추종함을 만천하에 나타낸 것인데, 이후 이 일로 해서 위태로움에 처했을런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 사건은 이태껏 예수를 흠모하며 이어온 그의 은밀하고 위험한 모험의 종지부를 찍는 일이기도 하였다.    

    그 이후 니고데모의 사적에 관해 성경에는 아무 기록이 없다. 그는 지난 날 자기의 우유부단했던 신앙을 부끄러워하며, 예수의 말씀을 되새겼을까.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할 하심이라"(요3:17)

 

   우리는 니고데모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돌이켜 보면, 니고데모, 그는 부귀와 권세, 관습과 무지에 머물지 않고 진리를 찾아 위험한 모험을 감수한 용기있는 사람이었다. 지난 어느 날 밤에 그가 예수를 찾아가 문답을 나누었을 때,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이 한 일은 모두 하느님의 뜻을 따라 한 일이라는 것을 드러나게 한다.>라는 예수의 마지막 답변에, 니고데모는 더는 묻지 못했었다. 비록 그의 의구심은 예수의 죽음에 이를 때까지 이어졌겠지만, 그래도 그는 예수를 끝내 저버리지 않았다. 예수의 시신을 스스로 수습함으로써 그는 예수의 말씀에 수긍하였던 것이다. 

   니고데모는 오늘의 우리에게 누구인가? 어쩌면 그는 곧 오늘의 우리들이 아닌가. 오늘날 보통 사람들의 지니는 신앙의 모습과, 그 한계가 니고데모의 모습을 통해 잘 드러난다. 니고데모를 통해 우리는, 제아무리 높은 학식과 명예와 부를 누린다 할지라도 인생의 궁극적 문제, 곧 죽음이나 중생 및 구원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할 뿐 아니라 궁금함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또한 신앙의 길에는 의구심을 넘어서기까지 지난한 과정이 지속되며 결국 스스로 믿음을 결단하지 못하는 자가 진리를 보게 될 때는 큰 희생과 죄책이 따른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매우 유식(?)해졌다. 교육을 받았으며 굶지 않는 생활을 하며 누군가에 의해 직접적으로 핍박받지 아니한다. 그런 우리가 교회 근처를 서성이기도 하고 교회 예배에 참여하기도 한다. 우리는 자신의 신앙이 그리 튼실하지도 확고하지도 못하여 고뇌한다. 우리는 십상 니고데모같은 사람이다. 그러나 도리어 우리가 니고데모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도 보람되지 않을까. 어설픈 신앙으로 자신을 치장하지 않고, 예수를 만나나 의구심으로 캐물은 니고데모처럼 우리도 참신앙에 이르기까지 거듭 캐물어야 하지 않을까. 니고데모를 생각할 때, 의구심이란 결코 신앙의 장애요소인 것만은 아니다. 우리도 예수를 생각하고 신앙의 길을 꿈꾸되 의구심을 갖기로는 적어도 니고데모 정도는 되어야 하겠다. 

  

 

2009.09.12